[論 文]
역사 인식에서 미래 전망의 역사교육적 의미
宋 相 憲
1. 머리말
2. 역사 인식의 회고적 성격
3. 역사 인식에서의 미래 참조
4. 역사교육에서 미래 전망의 의미
5. 맺음말
역사의 본성은 인식 주체의 인식 결과를 다룬다는 점에 있다. 역사에서 벌어지는 논란의 대부분은 인식의 주체가 어떻게 역사를 인식하느냐 하는 문제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역사에서 역사 인식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역사의 이런 본성을 반영하여 역사교육에서도 역사를 인식하는 과정이나 방법, 결과를 가르치는 일은 매우 중요한 과제일 수밖에 없다. 역사 인식 교육과 관련하여 유의할 것은 역사를 인식하는 것이 물리적인 현상을 인식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이다. 역사는 본디 관찰자와 관찰대상을 분리하여 논의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교육에서 다루는 지식으로서의 역사 인식 또한 객관적인 지식일 수 없다. 역사교육이 객관적인 지식을 가르치는 일반 교과와 구별되는 성질을 갖는 교과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러한 역사교육의 본성 때문에 교육학에서 통칭교과 개념으로 역사교육에 접근하는 것은 한계가 분명하다. 지금까지 역사교육 논의에서 역사 인식 문제를 다룬 연구는 많지 않았다. 역사 인식이라는 용어 자체가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은 것은 물론 역사 인식에 대한 논의는 주로 역사적 사고 영역에서 다루어져 왔다. 역사를 인식한다는 것이 사고의 과정이기 때문에 역사 인식 문제가 역사적 사고의 논의 대상으로 간주되어 온 것은 자연스런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역사 인식은 역사적 사고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면을 지닌다. 기왕의 연구에서도 역사적 사고 영역에서 역사 인식을 다루게 되면, 심리학적인 면에 주목하여 사고 양식이나 사고 기능에 관한 논의로 흘러버리는 문제점이 지적된 바 있다. 따라서 역사교육과 관련한 논의는 역사를 인식하는 과정이나 결과 자체를 정면으로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다. 역사의 연구 과정에서 개입되는 역사 인식은 크게 보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인간의 과거를 대상으로 사실을 확증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인식이고 다른 하나는 확증된 사실을 바탕으로 역사를 서술할 때 개입되는 인식이다. 대체로 사실을 확증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인식은 모든 교과에 통용되는 영역 중립적(domain neutral) 사고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반면에 역사 영역에 독특한 인식(domain specific)은 역사 서술 과정에서 나타난다. 따라서 역사교육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역사 서술 과정에서 나타나는 역사 인식이다. 본고는 역사 서술 과정에 개입되는 역사 인식 가운데 미래 展望의 문제를 규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 구체적인 모습은 시간성 개념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이 문제는 역사교육의 미래 교육적 성격과도 관련된다. 역사교육의 이런 성격을 살펴보기 위해 먼저 역사 인식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회고(後測)의 성격을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역사 인식에서의 시간성 개념과 미래 인식이 작용하는 모습을 드러내어 역사교육이 가지는 미래 교육으로서의 특성을 규명하고자 한다.
한국의 買地券
李 宇 泰
1. 머리말
2. 買地券의 기원과 변천
3. 매지권 사례 검토
4. 한국 매지권의 성격과 기원
5. 맺음말
일반적으로 買地券이란 돌이나 항아리에 묘지의 매입과 피장자의 安護를 기원하는 주술적인 문장을 기록한 문서를 말한다. 매지권은 원래 중국에서 시작된 장례 의식의 하나로, 묘지에 대한 신의 보호를 기원하는 주술적인 풍습이라고 할 수 있다. 보통 당시에 통용되는 화폐나 古錢, 또는 화폐나 지폐와 비슷한 유사화폐 등을 묘지에 함께 넣어 地神으로부터 묘소에 쓸 땅을 매입하는 형식을 밟는데, 이 때에 이를 증명하는 문서를 돌이나 항아리에 새겨 壙中에 함께 埋納한 것을 말한다. 요즈음도 장례 행렬의 앞에서 돈(買路錢)을 뿌리면서 신에게서 길을 사는 의식을 행하거나, 下棺에 앞서 가짜 종이돈을 태우는 등의 의식은 이러한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다. 대부분의 매지권은 민간신앙이나 도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까닭에 매지권은 그 형식적인 면뿐만 아니라 매납 목적에서도 일반 墓誌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매지권의 출토 사례가 극히 드문 까닭에 매지권에 대한 관심도 적었고 따라서 이에 대한 연구도 별로 없었다. 매지권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은 무령왕릉의 발견 이후인데, 당시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킨 무령왕릉 출토의 誌石에 대해서 이것이 묘지가 아니라 매지권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부터였다. 그 후 이 지석의 성격에 대한 논의가 상당히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매지권에 대한 많은 사례가 보고되면서 무령왕릉 출토의 지석은 매지권과 묘지의 복합체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고, 필자도 이에 동의하는 바이다. 무령왕릉의 매지권 이외에도, 고려시대에도 몇몇 승려의 매지권이 존재하고 있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매지권들은 아직 수적으로 영세한 까닭에, 이에 대한 관심이 그리 높지 않아 고려의 매지권들도 묘지의 일종으로 취급되기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는 우리나라의 매지권에 대한 전모가 대략 밝혀지게 되었지만, 아직 매지권의 사례가 많지 않아 우리나라의 매지권들이 상호 어떤 연관을 갖고 있으며, 그 기원이 단일한 것인지 아니면 시대에 따라 각각 다른 것인지에 대한 검토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 지금까지 알려진 매지권 이외에 다른 유사한 사례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아직 정밀하게 검토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고려시기의 묘지 가운데에서 매지권은 아니지만 묘지의 매입와 관련된 기록이 있는 묘지 한 예가 있는데, 이에 대해서도 성격 규명과 함께 보다 정밀한 고찰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高麗 元宗末·忠烈王初 元의 屯田置廢와 麗元關係
辛 素 然
1. 序 言
2. 元宗末 元의 屯田設置와 그 經緯
3. 元 屯田의 運營과 高麗의 處地
4. 忠烈王初 麗元關係의 變化와 元의 屯田 廢止
5. 結 語
高麗는 몽골과의 戰亂이 終熄될 무렵 안팎으로 커다란 문제에 봉착하고 있었다. 약화된 왕권의 회복 및 장기간의 抗戰으로 인하여 파괴된 정치, 경제, 사회 질서의 복구는 급선무였으나 元의 극심한 간섭과 수탈은 사태의 수습을 무척 어렵게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元宗의 즉위(1260)와 함께 麗·蒙 강화가 이루어졌다. 고려 왕조가 제반 과제를 해결하는 일은 至難하였고, 몽골의 정치·경제적 요구는 더욱 무겁고 번다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원종 12년(1271)에 설치되어 忠烈王 4년(1278)까지 존속되었던 元 屯田의 설치 및 운영이었다. 元 둔전의 설치와 운영을 위해서는 고려 측의 人的·物的 조달이 강제되었다. 이로 인한 막대한 부담은 곧 고려의 재정에 영향을 미쳤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元 둔전의 운영은 元과 고려 사이의 정치·군사적 사안이어서 양국의 대내외 정책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그간 元 둔전은 고려시대 전반에 걸쳐 둔전제가 변화한 양상이나 고려 후기 농업, 元 간섭기 군사제도의 변화 속에서 부분적으로 다루어졌다. 이 밖에 일본 원정을 둘러싼 고려와 元의 관계를 살펴보는 속에서 혹은 元 조정이 고려를 통치하기 위한 정책의 하나로서 언급되었다. 이들 연구는 元 둔전을 크게 두 측면에서 주목하였다. 하나는 대몽 강화 이후 元이 일본 정벌에 대비하여 군량을 확보하기 위해 고려 영토에 강제적으로 둔전을 설치했으며 이를 통해 고려에 막대한 재정 부담을 전가하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元 둔전이 일본 정벌을 위해 설치되고 운영되었다는 기존의 관점에서 나아가 元 둔전은 고려를 통치하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과로 元이 고려에 둔전을 설치한 기본 목적과 그것이 고려에 끼친 영향이 밝혀졌다. 그러나 元 둔전을 농업, 군사 제도의 변화 또는 대외 관계의 일부로 국한하고 있어 元 둔전 자체의 실제적 운영 및 폐지 과정이 분명하게 구명되지 못하였다. 게다가 元 둔전과 麗·元 양국의 처지 및 정책과의 관계를 부수적으로 파악하여 元 둔전의 置廢가 갖는 의미가 제대로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 최근, 元 둔전이 서해도 지역에 한정하여 단기간 설치되었다는 전제 하에 元 둔전의 치폐시기와 원인, 지역에 대한 새로운 검토가 나왔다. 이 연구는 元 둔전의 운영과 상관하여 홍다구 일가의 정치적 영향력을 중시하였고, 元 둔전이 변질되고 폐지되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남송의 멸망을 들었다. 그러므로 元 둔전의 치폐과정에 관해 고려의 노력과 정황은 배제한 채, 주로 元의 처지를 중심으로 설명하였고, 元 둔전의 존재를 서해 지역에서만 인정하여 전라도 및 경상도 일대의 것과 그 중요성을 간과하였다. 지금까지 元 둔전은 관련된 제도의 변화 또는 대외 관계 속에서 다루어지거나 元 또는 고려의 어느 한 편에서 단선적으로 이해한 면이 강하였다. 이로 인해, 元 둔전은 양국의 대내외 정황과 매우 긴밀한 관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麗·元 사회와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元 간섭기 고려 내 둔전은 麗·元의 대내외 사정을 고려하는 위에서 元 둔전의 실체 및 그 변모양상을 정리하고 아울러 충렬왕대에 새롭게 전개되는 麗·元 관계의 변화를 전망할 필요가 있다. 본고는 이러한 목표에서 원종 12년(1271) 이후 충렬왕 4년(1278)에 이르기까지 元 둔전의 치폐와 운영 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방향에서 검토하고자 한다. 첫째, 원종 대에 元의 둔전이 고려에 설치되는 경위를 麗·元 양국의 정황과 관련하여 살피고, 둘째, 元 둔전의 구체적인 운영 방식과 고려 측의 부담 및 성격과 영향을 고찰하며, 셋째, 충렬왕 즉위 이후 변화되는 麗·元 관계와 관련하여 元 둔전의 폐지 원인과 의미에 대하여 추적하는 것이다.
『한중록』의 정치사적 이해
崔 誠 桓
1. 서언
2. 한중록 연구의 동향과 문제제기
3. 庚申換局 전후의 정국 동향과 「閑中漫錄」·「泣血錄」
4. 순조 親政 이후의 정국 동향과 「恨中錄」·「丙寅追錄」
5. 결어
혜경궁 홍씨가 저술한 『한중록』은 임오화변의 실상을 밝힌 저술로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한중록』에 기술된 사건이 비단 임오화변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영조 40년 갑신처분 이후 경주 김씨와 풍산 홍씨의 대립 구도, 홍봉한을 겨냥한 공홍파들의 동향, 세손 대리청정을 둘러싼 대립구도와 홍국영의 역할, 정조대 후반 정조의 사도세자 추숭 노력, 순조대 초반 정순왕후를 포함한 경주 김씨의 일방적 정국운영 등이 임오화변 자체에 대한 설명보다 더욱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물론 이런 요소들은 임오화변과 직간접으로 연계되어 있으나 엄밀히 말하면 별개의 사건들이다. 이러한 여러 사건들에 대한 혜경궁의 설명은 대단히 깊이있고 정확한 정보를 담고 있기에 영조 후반에서 순조 전반의 정국을 이해하는 데 훌륭한 사료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동안 『한중록』을 지나치게 임오화변에 초점을 두어 연구한 결과, 『한중록』은 임오화변의 진상을 영조와 사도세자의 정신병적 대립 구도로 설명하기 위해, 혹은 혜경궁 가문의 보존을 목표로 홍봉한·홍인한·홍낙임 등의 잘못을 변명하기 위해 저술된 것으로 설명되었다. 그 결과 『한중록』은 남편보다 가문의 이해를 더 앞세운 혜경궁의 편향된 증언으로 간주되어 그 사료 가치는 제대로 인정되지 않고 있다. 기존의 설명은 『한중록』의 전체 구성과 당시의 역사적 맥락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결과라고 판단된다. 물론 이들 가운데 정조의 유명한 ‘甲子年 구상’의 근거를 『한중록』에서 제시한 연구는 『한중록』의 활용 가능성을 한단계 높인 것이었지만,『한중록』 전체의 맥락을 분석하는 데는 미치지 않았다. 본고는 『한중록』 각 편의 내용을 시기별로 분류한 후, 각 시기의 정국 동향을 충분히 고려한 후, 시기별로 이에 대처하려 했던 혜경궁의 노력을 중심으로 『한중록』을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한중록』이 단지 가문의 伸寃만 앞세우는 궁중 여인의 恨이 서린 문학 작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시기 왕실의 주요 과제와 정국 대립의 이유를 설명해주는 왕실 역사 기록으로 더욱 존중되기를 기대한다.
일제하 조선경찰의 특징과 그 이미지
이 상 의
1. 서언
2. 일제의 조선지배와 경찰제도 운용
3. 조선경찰의 특징과 조선인의 반응
4. 조선인이 가진 경찰 이미지
5. 결어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종래 조선의 관습에 대신하여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고자 시도하였다. 일제하 조선에서의 경찰은 통치기구의 최말단에 위치하면서 조선을 식민지로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식민지 권력을 중앙에서 지방으로, 상부에서 하부로 침투시키고 그 의도를 관철시키는 주요한 수단이었다. 이들은 조선총독부 내의 어떠한 기관보다 숫적인 우위와 조직력을 가지고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면서, 식민지체제의 성립과 유지, 그리고 전시동원을 위해 활용되었다. 일제하 조선의 경찰은 조선을 식민지로 유지하기 위해 민족해방운동 세력을 탄압하고 체제를 유지하는 치안유지의 기능을 가장 중요시 하였다. 또한 경찰은 조선인의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을 감시하고 모든 행위를 규제할 수 있는 방대한 권한과 직무를 부여받았다. 규제에 대한 위반 여부를 결정하고 처벌의 강도를 정하는 일도 경찰의 자의적 판단에 맡겨졌다. 그러나 상당수의 경찰은 업무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지 못했고, 따라서 그들은 효율적 통치를 위해 폭력적인 방식으로 조선인을 상대해 나갔다. 이러한 경찰에 대해 조선인이 지닌 이미지가 모든 이에게 동일했던 것은 아니다. 순사가 되려고 지망하는 이들이 모집인원의 몇 배를 넘을 만큼 경찰은 일부 조선인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순사로 대변되는 경찰에 대해 조선인 전반이 지닌 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일본인이든 조선인이든 순사는 그 자체로서 조선인에게 공포의 대상이자 경멸의 대상이었다. 경찰이라는 공권력에 의해 합법, 비합법적인 폭력이 일상적으로 행해지면서, 그에 대한 이미지도 부정적인 모습을 띠게 된 것이다. 게다가 愚民觀에 기초한 경찰 범죄가 만연하면서 경찰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확산시키는 데 한몫하였다. 경찰의 지휘에 따르는 조선인의 순치된 모습은 대개 단속과 처벌을 피하기 위한 몸짓이었을 뿐 자발적이지 않았다. 곧 경찰제도나 그 시책에서 나타나는 근대성은 조선인이 그에 맞도록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개개인의 근대성 습득 과정으로 연결되지는 못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형성된 경찰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주변과 일상에서 끊임없이 조선인을 힘들게 했던 일제의 지배에 대한 조선인의 강력한 저항의 한 방식이었다.
고대 로마 교육에서 학생 체벌의 문제
安 熙 惇
1. 서언
2. 체벌에 대한 견해와 실태
3. 체벌 문제와 로마 사회
4. 결어
서양 고대 교육에서 체벌은 고대 세계가 종말을 고할 때까지 교육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여겨졌다. 이러한 태도는 고대인의 교육관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들은 조상 전래의 지적 전통을 전달하는 것을 교육의 목적으로 여겼고 이를 위하여 육체의 단련과 마찬가지로 엄정하고 강도 높은 ‘마음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어린 학생의 심리 상태에 대한 교육적 배려는 없었다. 그들은 아이들은 비이성적인 존재이므로 체벌은 불가피하다고 여겼다. 로마 제정기에 들어서 이런 저런 근거에서 체벌에 반대하는 일부 주장이 등장하였다. 그들의 주장이 널리 수용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이 나오게 된 배경의 하나로서 고대 로마 사회의 계급적 성격을 들 수 있다. 공교육 제도가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던 고대 로마 사회에서 제국 후기로 갈수록 교사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불안정하였고, 그리하여 교사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학부모의 비위를 맞추고 학생을 확보하기 위하여 경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고등교육단계로 올라갈수록 학생 구성은 귀족층 자제들로만 구성되었다. 미래의 품위 있는 시민으로서, 노예를 다스리는 주인으로서, 그리고 공무를 담당하는 명예로운 시민으로서 육성되기 위해서 체벌은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이러한 여러 요인들이, 체벌은 효과적인 학습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하는 기존의 판단과 충돌하면서 결국 교사와 학생간의 갈등과 긴장을 만들어내는 원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사가 교육적 소신을 가지고 체벌을 자유롭게 하기에는 어려웠을 것이다.
세계경제대공황과 스딸린주의 경제학 담론, 1929~1936: 바르가를 중심으로
盧 璟 德
1. 서론
2. 바르가와 세계경제세계정치 연구소의 경제학 방법론
3. “위기”, 1929~1932
4. “특별한 종류의 불황”과 “회복”, 1932~1936
5. 결론
1929년 10월 미국에서 발생해 전세계로 급속도로 퍼진 소위 세계경제대공황(이하 대공황)에 대한 이해는 당시 막 소련의 정권을 장악했던 스딸린과 그의 추종자들에게 하나의 정치적 현안이었다. 이 전대미문의 대규모 경제 위기가 가져올 변화는 경제 부문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향후 세계 질서 및 국제 관계의 변동을 수반하여, 소련의 안보 문제와 직결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스딸린과 당 지도부가 대공황의 기원을 어떻게 규정하고, 그 추이를 어떻게 바라보았으며, 그 방향을 어떻게 예측했느냐를 파악하는 것은 1930년대 초·중반 소련의 안보 정책, 즉 외교 노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될 수 있다. 소련 공산당 지도자들의 대공황 인식을 알아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당연히 그들이 직접 남긴 자료들을 분석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문건들은 그 양도 지극히 적을 뿐만 아니라 그 소수의 자료들조차 매우 산발적인 형태로만 남아있다. 스딸린은 공식 석상, 또는 심지어는 사석에서도 말을 아끼던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만큼, 구소련의 문서고가 열린 현 시점에서도 그의 육성이 담긴 대공황 관련 기록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다른 공산당 지도자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이들이 남긴 자료라고는 몰로또프와 몇몇 코민테른 관련 인물들의 논평이나 프로파겐다 수준의 문건들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 연구는 소련 언론에 실린 대공황에 관련된 여러 형태의 글들 —신문 사설, 잡지 논평, 학술지 논문, 소책자, 연구서 등—을 분석함으로써 스딸린과 당 지도부의 생각을 간접적으로 추론해내려 노력했다. 하지만 구소련 문서고 자료들에 접근할 수 없었던 이런 연구들은 당시 저자들의 구체적인 인적 배경, 지성계에서의 위치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정치권과의 친밀성에 대한 지식이 없었고, 그 글들의 저술, 출판 및 배포 과정을 조명해주는 당과 학계 내부에 대한 정보를 이용할 수 없었기에, 위의 다양한 형태의 저작들이 소련의 정치권에 미치는 상대적 영향력을 가늠할 수 없었다. 또한 기존 연구는 소련 언론에 출판된 글들이 지니는 이중적 성격, 즉 과학적 연구 경향과 프로파겐다 지향성 사이의 경계선을 긋지 않고 이를 무차별적으로 분석했다. 그 결과 대공황을 바라보는 스딸린 시대 소련 지성계의 일관된 흐름은 적절히 드러나지 않았다. 본고는 스딸린과 당 지도부의 대공황 인식에 보다 체계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독재자의 사실상 유일한 서양 경제관련 문제 자문관이었던 예브게니 바르가(Е.Варга)와 그의 연구소의 작업을 살펴볼 것이다. 바르가는 1879년 헝가리 출생으로 부다페스트 대학 시절부터 맑스주의 논객으로 이름을 알린 인물이었다. 1918년 헝가리 소비에트 혁명 정권에서 재정 인민위원을 맡았으며, 1920년 소련으로의 망명 이후에는, 주로 독일 베를린에 거주하면서 코민테른의 한 경제 연구소를 이끌었다. 1927년 바르가는 스딸린의 추천에 의해 모스크바로 다시 소환되어 공산주의 학술원 소속 세계경제세계정치 연구소의 소장이 되었고 이후 스딸린 캠프에 가담하여 부하린의 조직자본주의론에 대한 주요 비판자로 활약했다. 원래 소규모 프로파겐다 기관에 불과하던 이 연구소는, 1929년 대공황 발생 이후, 스딸린의 후원 아래 비약적으로 성장하여 1931년 말에 이르면 소련 내 독점적인 서양 경제 연구기관으로 발전하였고, 1940년대 후반까지 스딸린주의 경제학을 대표하는 지위를 누렸다. 이 기간 동안 바르가와 그의 연구소 동료들은 스딸린과 당 지도부에게 세계경제 동향을 분석하는 보고서를 정례적으로 제출하였으며, 특정한 주요 국제정치 관련 현안들에 대해서도 자문 역할을 수행하였다. 1930년대 초·중반 바르가와 그의 연구소는 스딸린과 당 지도부의 요청으로 대공황에 대한 일련의 보고서들을 작성하게 된다. 이 보고서들은 몰로또프와 스딸린의 공식 석상 연설문에 반영되었고 그 중 일부는 정치권의 후원으로 출판될 정도로, 소련 당 지도자들에 가장 근접해 있었던 자료들 중 하나이다. 이들은 대공황에 대한 일반적인 논평이나 프로파겐다 수준의 글들은 아니었으며, 바르가와 그의 연구소의 독특한 경제학이 녹아 있는 과학적 연구물들이었다. 바르가 집단의 경제학은 당시 서양학계와 맑스주의 지성계에서 각광 받던 경제 위기이론들과 방법론들을 발전시켜 대공황의 기원과 발전방향의 문제를 탐구하는 학문적 시도였다. 본고는 바르가 집단의 보고서들을 하나의 텍스트로 간주하고 이를 근래 지성사에서 자주 이용하는 담론 분석 방법론을 통해 탐구할 것이다. 경제사상간의 개념적 연결고리에 주목하고 텍스트의 내용 분석에 집중하는 전통적인 사상사적 접근법을 무시하지는 않으면서, 보다 그것의 형식과 구조에 주목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본고는 바르가와 그의 연구소의 저작들이 만들어내고 스딸린주의 지도부가 공유했던 담론의 장(discursive field)을 드러내려 할 것이다.
[彙 報]
역사 인식에서 미래 전망의 역사교육적 의미
宋 相 憲
1. 머리말
2. 역사 인식의 회고적 성격
3. 역사 인식에서의 미래 참조
4. 역사교육에서 미래 전망의 의미
5. 맺음말
역사의 본성은 인식 주체의 인식 결과를 다룬다는 점에 있다. 역사에서 벌어지는 논란의 대부분은 인식의 주체가 어떻게 역사를 인식하느냐 하는 문제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역사에서 역사 인식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역사의 이런 본성을 반영하여 역사교육에서도 역사를 인식하는 과정이나 방법, 결과를 가르치는 일은 매우 중요한 과제일 수밖에 없다. 역사 인식 교육과 관련하여 유의할 것은 역사를 인식하는 것이 물리적인 현상을 인식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이다. 역사는 본디 관찰자와 관찰대상을 분리하여 논의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교육에서 다루는 지식으로서의 역사 인식 또한 객관적인 지식일 수 없다. 역사교육이 객관적인 지식을 가르치는 일반 교과와 구별되는 성질을 갖는 교과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러한 역사교육의 본성 때문에 교육학에서 통칭교과 개념으로 역사교육에 접근하는 것은 한계가 분명하다. 지금까지 역사교육 논의에서 역사 인식 문제를 다룬 연구는 많지 않았다. 역사 인식이라는 용어 자체가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은 것은 물론 역사 인식에 대한 논의는 주로 역사적 사고 영역에서 다루어져 왔다. 역사를 인식한다는 것이 사고의 과정이기 때문에 역사 인식 문제가 역사적 사고의 논의 대상으로 간주되어 온 것은 자연스런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역사 인식은 역사적 사고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면을 지닌다. 기왕의 연구에서도 역사적 사고 영역에서 역사 인식을 다루게 되면, 심리학적인 면에 주목하여 사고 양식이나 사고 기능에 관한 논의로 흘러버리는 문제점이 지적된 바 있다. 따라서 역사교육과 관련한 논의는 역사를 인식하는 과정이나 결과 자체를 정면으로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다. 역사의 연구 과정에서 개입되는 역사 인식은 크게 보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인간의 과거를 대상으로 사실을 확증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인식이고 다른 하나는 확증된 사실을 바탕으로 역사를 서술할 때 개입되는 인식이다. 대체로 사실을 확증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인식은 모든 교과에 통용되는 영역 중립적(domain neutral) 사고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반면에 역사 영역에 독특한 인식(domain specific)은 역사 서술 과정에서 나타난다. 따라서 역사교육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역사 서술 과정에서 나타나는 역사 인식이다. 본고는 역사 서술 과정에 개입되는 역사 인식 가운데 미래 展望의 문제를 규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 구체적인 모습은 시간성 개념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이 문제는 역사교육의 미래 교육적 성격과도 관련된다. 역사교육의 이런 성격을 살펴보기 위해 먼저 역사 인식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회고(後測)의 성격을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역사 인식에서의 시간성 개념과 미래 인식이 작용하는 모습을 드러내어 역사교육이 가지는 미래 교육으로서의 특성을 규명하고자 한다.
한국의 買地券
李 宇 泰
1. 머리말
2. 買地券의 기원과 변천
3. 매지권 사례 검토
4. 한국 매지권의 성격과 기원
5. 맺음말
일반적으로 買地券이란 돌이나 항아리에 묘지의 매입과 피장자의 安護를 기원하는 주술적인 문장을 기록한 문서를 말한다. 매지권은 원래 중국에서 시작된 장례 의식의 하나로, 묘지에 대한 신의 보호를 기원하는 주술적인 풍습이라고 할 수 있다. 보통 당시에 통용되는 화폐나 古錢, 또는 화폐나 지폐와 비슷한 유사화폐 등을 묘지에 함께 넣어 地神으로부터 묘소에 쓸 땅을 매입하는 형식을 밟는데, 이 때에 이를 증명하는 문서를 돌이나 항아리에 새겨 壙中에 함께 埋納한 것을 말한다. 요즈음도 장례 행렬의 앞에서 돈(買路錢)을 뿌리면서 신에게서 길을 사는 의식을 행하거나, 下棺에 앞서 가짜 종이돈을 태우는 등의 의식은 이러한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다. 대부분의 매지권은 민간신앙이나 도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까닭에 매지권은 그 형식적인 면뿐만 아니라 매납 목적에서도 일반 墓誌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매지권의 출토 사례가 극히 드문 까닭에 매지권에 대한 관심도 적었고 따라서 이에 대한 연구도 별로 없었다. 매지권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은 무령왕릉의 발견 이후인데, 당시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킨 무령왕릉 출토의 誌石에 대해서 이것이 묘지가 아니라 매지권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부터였다. 그 후 이 지석의 성격에 대한 논의가 상당히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매지권에 대한 많은 사례가 보고되면서 무령왕릉 출토의 지석은 매지권과 묘지의 복합체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고, 필자도 이에 동의하는 바이다. 무령왕릉의 매지권 이외에도, 고려시대에도 몇몇 승려의 매지권이 존재하고 있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매지권들은 아직 수적으로 영세한 까닭에, 이에 대한 관심이 그리 높지 않아 고려의 매지권들도 묘지의 일종으로 취급되기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는 우리나라의 매지권에 대한 전모가 대략 밝혀지게 되었지만, 아직 매지권의 사례가 많지 않아 우리나라의 매지권들이 상호 어떤 연관을 갖고 있으며, 그 기원이 단일한 것인지 아니면 시대에 따라 각각 다른 것인지에 대한 검토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 지금까지 알려진 매지권 이외에 다른 유사한 사례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아직 정밀하게 검토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고려시기의 묘지 가운데에서 매지권은 아니지만 묘지의 매입와 관련된 기록이 있는 묘지 한 예가 있는데, 이에 대해서도 성격 규명과 함께 보다 정밀한 고찰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高麗 元宗末·忠烈王初 元의 屯田置廢와 麗元關係
辛 素 然
1. 序 言
2. 元宗末 元의 屯田設置와 그 經緯
3. 元 屯田의 運營과 高麗의 處地
4. 忠烈王初 麗元關係의 變化와 元의 屯田 廢止
5. 結 語
高麗는 몽골과의 戰亂이 終熄될 무렵 안팎으로 커다란 문제에 봉착하고 있었다. 약화된 왕권의 회복 및 장기간의 抗戰으로 인하여 파괴된 정치, 경제, 사회 질서의 복구는 급선무였으나 元의 극심한 간섭과 수탈은 사태의 수습을 무척 어렵게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元宗의 즉위(1260)와 함께 麗·蒙 강화가 이루어졌다. 고려 왕조가 제반 과제를 해결하는 일은 至難하였고, 몽골의 정치·경제적 요구는 더욱 무겁고 번다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원종 12년(1271)에 설치되어 忠烈王 4년(1278)까지 존속되었던 元 屯田의 설치 및 운영이었다. 元 둔전의 설치와 운영을 위해서는 고려 측의 人的·物的 조달이 강제되었다. 이로 인한 막대한 부담은 곧 고려의 재정에 영향을 미쳤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元 둔전의 운영은 元과 고려 사이의 정치·군사적 사안이어서 양국의 대내외 정책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그간 元 둔전은 고려시대 전반에 걸쳐 둔전제가 변화한 양상이나 고려 후기 농업, 元 간섭기 군사제도의 변화 속에서 부분적으로 다루어졌다. 이 밖에 일본 원정을 둘러싼 고려와 元의 관계를 살펴보는 속에서 혹은 元 조정이 고려를 통치하기 위한 정책의 하나로서 언급되었다. 이들 연구는 元 둔전을 크게 두 측면에서 주목하였다. 하나는 대몽 강화 이후 元이 일본 정벌에 대비하여 군량을 확보하기 위해 고려 영토에 강제적으로 둔전을 설치했으며 이를 통해 고려에 막대한 재정 부담을 전가하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元 둔전이 일본 정벌을 위해 설치되고 운영되었다는 기존의 관점에서 나아가 元 둔전은 고려를 통치하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과로 元이 고려에 둔전을 설치한 기본 목적과 그것이 고려에 끼친 영향이 밝혀졌다. 그러나 元 둔전을 농업, 군사 제도의 변화 또는 대외 관계의 일부로 국한하고 있어 元 둔전 자체의 실제적 운영 및 폐지 과정이 분명하게 구명되지 못하였다. 게다가 元 둔전과 麗·元 양국의 처지 및 정책과의 관계를 부수적으로 파악하여 元 둔전의 置廢가 갖는 의미가 제대로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 최근, 元 둔전이 서해도 지역에 한정하여 단기간 설치되었다는 전제 하에 元 둔전의 치폐시기와 원인, 지역에 대한 새로운 검토가 나왔다. 이 연구는 元 둔전의 운영과 상관하여 홍다구 일가의 정치적 영향력을 중시하였고, 元 둔전이 변질되고 폐지되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남송의 멸망을 들었다. 그러므로 元 둔전의 치폐과정에 관해 고려의 노력과 정황은 배제한 채, 주로 元의 처지를 중심으로 설명하였고, 元 둔전의 존재를 서해 지역에서만 인정하여 전라도 및 경상도 일대의 것과 그 중요성을 간과하였다. 지금까지 元 둔전은 관련된 제도의 변화 또는 대외 관계 속에서 다루어지거나 元 또는 고려의 어느 한 편에서 단선적으로 이해한 면이 강하였다. 이로 인해, 元 둔전은 양국의 대내외 정황과 매우 긴밀한 관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麗·元 사회와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元 간섭기 고려 내 둔전은 麗·元의 대내외 사정을 고려하는 위에서 元 둔전의 실체 및 그 변모양상을 정리하고 아울러 충렬왕대에 새롭게 전개되는 麗·元 관계의 변화를 전망할 필요가 있다. 본고는 이러한 목표에서 원종 12년(1271) 이후 충렬왕 4년(1278)에 이르기까지 元 둔전의 치폐와 운영 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방향에서 검토하고자 한다. 첫째, 원종 대에 元의 둔전이 고려에 설치되는 경위를 麗·元 양국의 정황과 관련하여 살피고, 둘째, 元 둔전의 구체적인 운영 방식과 고려 측의 부담 및 성격과 영향을 고찰하며, 셋째, 충렬왕 즉위 이후 변화되는 麗·元 관계와 관련하여 元 둔전의 폐지 원인과 의미에 대하여 추적하는 것이다.
『한중록』의 정치사적 이해
崔 誠 桓
1. 서언
2. 한중록 연구의 동향과 문제제기
3. 庚申換局 전후의 정국 동향과 「閑中漫錄」·「泣血錄」
4. 순조 親政 이후의 정국 동향과 「恨中錄」·「丙寅追錄」
5. 결어
혜경궁 홍씨가 저술한 『한중록』은 임오화변의 실상을 밝힌 저술로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한중록』에 기술된 사건이 비단 임오화변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영조 40년 갑신처분 이후 경주 김씨와 풍산 홍씨의 대립 구도, 홍봉한을 겨냥한 공홍파들의 동향, 세손 대리청정을 둘러싼 대립구도와 홍국영의 역할, 정조대 후반 정조의 사도세자 추숭 노력, 순조대 초반 정순왕후를 포함한 경주 김씨의 일방적 정국운영 등이 임오화변 자체에 대한 설명보다 더욱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물론 이런 요소들은 임오화변과 직간접으로 연계되어 있으나 엄밀히 말하면 별개의 사건들이다. 이러한 여러 사건들에 대한 혜경궁의 설명은 대단히 깊이있고 정확한 정보를 담고 있기에 영조 후반에서 순조 전반의 정국을 이해하는 데 훌륭한 사료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동안 『한중록』을 지나치게 임오화변에 초점을 두어 연구한 결과, 『한중록』은 임오화변의 진상을 영조와 사도세자의 정신병적 대립 구도로 설명하기 위해, 혹은 혜경궁 가문의 보존을 목표로 홍봉한·홍인한·홍낙임 등의 잘못을 변명하기 위해 저술된 것으로 설명되었다. 그 결과 『한중록』은 남편보다 가문의 이해를 더 앞세운 혜경궁의 편향된 증언으로 간주되어 그 사료 가치는 제대로 인정되지 않고 있다. 기존의 설명은 『한중록』의 전체 구성과 당시의 역사적 맥락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결과라고 판단된다. 물론 이들 가운데 정조의 유명한 ‘甲子年 구상’의 근거를 『한중록』에서 제시한 연구는 『한중록』의 활용 가능성을 한단계 높인 것이었지만,『한중록』 전체의 맥락을 분석하는 데는 미치지 않았다. 본고는 『한중록』 각 편의 내용을 시기별로 분류한 후, 각 시기의 정국 동향을 충분히 고려한 후, 시기별로 이에 대처하려 했던 혜경궁의 노력을 중심으로 『한중록』을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한중록』이 단지 가문의 伸寃만 앞세우는 궁중 여인의 恨이 서린 문학 작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시기 왕실의 주요 과제와 정국 대립의 이유를 설명해주는 왕실 역사 기록으로 더욱 존중되기를 기대한다.
일제하 조선경찰의 특징과 그 이미지
이 상 의
1. 서언
2. 일제의 조선지배와 경찰제도 운용
3. 조선경찰의 특징과 조선인의 반응
4. 조선인이 가진 경찰 이미지
5. 결어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종래 조선의 관습에 대신하여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고자 시도하였다. 일제하 조선에서의 경찰은 통치기구의 최말단에 위치하면서 조선을 식민지로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식민지 권력을 중앙에서 지방으로, 상부에서 하부로 침투시키고 그 의도를 관철시키는 주요한 수단이었다. 이들은 조선총독부 내의 어떠한 기관보다 숫적인 우위와 조직력을 가지고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면서, 식민지체제의 성립과 유지, 그리고 전시동원을 위해 활용되었다. 일제하 조선의 경찰은 조선을 식민지로 유지하기 위해 민족해방운동 세력을 탄압하고 체제를 유지하는 치안유지의 기능을 가장 중요시 하였다. 또한 경찰은 조선인의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을 감시하고 모든 행위를 규제할 수 있는 방대한 권한과 직무를 부여받았다. 규제에 대한 위반 여부를 결정하고 처벌의 강도를 정하는 일도 경찰의 자의적 판단에 맡겨졌다. 그러나 상당수의 경찰은 업무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지 못했고, 따라서 그들은 효율적 통치를 위해 폭력적인 방식으로 조선인을 상대해 나갔다. 이러한 경찰에 대해 조선인이 지닌 이미지가 모든 이에게 동일했던 것은 아니다. 순사가 되려고 지망하는 이들이 모집인원의 몇 배를 넘을 만큼 경찰은 일부 조선인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순사로 대변되는 경찰에 대해 조선인 전반이 지닌 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일본인이든 조선인이든 순사는 그 자체로서 조선인에게 공포의 대상이자 경멸의 대상이었다. 경찰이라는 공권력에 의해 합법, 비합법적인 폭력이 일상적으로 행해지면서, 그에 대한 이미지도 부정적인 모습을 띠게 된 것이다. 게다가 愚民觀에 기초한 경찰 범죄가 만연하면서 경찰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확산시키는 데 한몫하였다. 경찰의 지휘에 따르는 조선인의 순치된 모습은 대개 단속과 처벌을 피하기 위한 몸짓이었을 뿐 자발적이지 않았다. 곧 경찰제도나 그 시책에서 나타나는 근대성은 조선인이 그에 맞도록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개개인의 근대성 습득 과정으로 연결되지는 못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형성된 경찰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주변과 일상에서 끊임없이 조선인을 힘들게 했던 일제의 지배에 대한 조선인의 강력한 저항의 한 방식이었다.
고대 로마 교육에서 학생 체벌의 문제
安 熙 惇
1. 서언
2. 체벌에 대한 견해와 실태
3. 체벌 문제와 로마 사회
4. 결어
서양 고대 교육에서 체벌은 고대 세계가 종말을 고할 때까지 교육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여겨졌다. 이러한 태도는 고대인의 교육관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들은 조상 전래의 지적 전통을 전달하는 것을 교육의 목적으로 여겼고 이를 위하여 육체의 단련과 마찬가지로 엄정하고 강도 높은 ‘마음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어린 학생의 심리 상태에 대한 교육적 배려는 없었다. 그들은 아이들은 비이성적인 존재이므로 체벌은 불가피하다고 여겼다. 로마 제정기에 들어서 이런 저런 근거에서 체벌에 반대하는 일부 주장이 등장하였다. 그들의 주장이 널리 수용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이 나오게 된 배경의 하나로서 고대 로마 사회의 계급적 성격을 들 수 있다. 공교육 제도가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던 고대 로마 사회에서 제국 후기로 갈수록 교사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불안정하였고, 그리하여 교사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학부모의 비위를 맞추고 학생을 확보하기 위하여 경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고등교육단계로 올라갈수록 학생 구성은 귀족층 자제들로만 구성되었다. 미래의 품위 있는 시민으로서, 노예를 다스리는 주인으로서, 그리고 공무를 담당하는 명예로운 시민으로서 육성되기 위해서 체벌은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이러한 여러 요인들이, 체벌은 효과적인 학습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하는 기존의 판단과 충돌하면서 결국 교사와 학생간의 갈등과 긴장을 만들어내는 원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사가 교육적 소신을 가지고 체벌을 자유롭게 하기에는 어려웠을 것이다.
세계경제대공황과 스딸린주의 경제학 담론, 1929~1936: 바르가를 중심으로
盧 璟 德
1. 서론
2. 바르가와 세계경제세계정치 연구소의 경제학 방법론
3. “위기”, 1929~1932
4. “특별한 종류의 불황”과 “회복”, 1932~1936
5. 결론
1929년 10월 미국에서 발생해 전세계로 급속도로 퍼진 소위 세계경제대공황(이하 대공황)에 대한 이해는 당시 막 소련의 정권을 장악했던 스딸린과 그의 추종자들에게 하나의 정치적 현안이었다. 이 전대미문의 대규모 경제 위기가 가져올 변화는 경제 부문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향후 세계 질서 및 국제 관계의 변동을 수반하여, 소련의 안보 문제와 직결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스딸린과 당 지도부가 대공황의 기원을 어떻게 규정하고, 그 추이를 어떻게 바라보았으며, 그 방향을 어떻게 예측했느냐를 파악하는 것은 1930년대 초·중반 소련의 안보 정책, 즉 외교 노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될 수 있다. 소련 공산당 지도자들의 대공황 인식을 알아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당연히 그들이 직접 남긴 자료들을 분석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문건들은 그 양도 지극히 적을 뿐만 아니라 그 소수의 자료들조차 매우 산발적인 형태로만 남아있다. 스딸린은 공식 석상, 또는 심지어는 사석에서도 말을 아끼던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만큼, 구소련의 문서고가 열린 현 시점에서도 그의 육성이 담긴 대공황 관련 기록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다른 공산당 지도자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이들이 남긴 자료라고는 몰로또프와 몇몇 코민테른 관련 인물들의 논평이나 프로파겐다 수준의 문건들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 연구는 소련 언론에 실린 대공황에 관련된 여러 형태의 글들 —신문 사설, 잡지 논평, 학술지 논문, 소책자, 연구서 등—을 분석함으로써 스딸린과 당 지도부의 생각을 간접적으로 추론해내려 노력했다. 하지만 구소련 문서고 자료들에 접근할 수 없었던 이런 연구들은 당시 저자들의 구체적인 인적 배경, 지성계에서의 위치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정치권과의 친밀성에 대한 지식이 없었고, 그 글들의 저술, 출판 및 배포 과정을 조명해주는 당과 학계 내부에 대한 정보를 이용할 수 없었기에, 위의 다양한 형태의 저작들이 소련의 정치권에 미치는 상대적 영향력을 가늠할 수 없었다. 또한 기존 연구는 소련 언론에 출판된 글들이 지니는 이중적 성격, 즉 과학적 연구 경향과 프로파겐다 지향성 사이의 경계선을 긋지 않고 이를 무차별적으로 분석했다. 그 결과 대공황을 바라보는 스딸린 시대 소련 지성계의 일관된 흐름은 적절히 드러나지 않았다. 본고는 스딸린과 당 지도부의 대공황 인식에 보다 체계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독재자의 사실상 유일한 서양 경제관련 문제 자문관이었던 예브게니 바르가(Е.Варга)와 그의 연구소의 작업을 살펴볼 것이다. 바르가는 1879년 헝가리 출생으로 부다페스트 대학 시절부터 맑스주의 논객으로 이름을 알린 인물이었다. 1918년 헝가리 소비에트 혁명 정권에서 재정 인민위원을 맡았으며, 1920년 소련으로의 망명 이후에는, 주로 독일 베를린에 거주하면서 코민테른의 한 경제 연구소를 이끌었다. 1927년 바르가는 스딸린의 추천에 의해 모스크바로 다시 소환되어 공산주의 학술원 소속 세계경제세계정치 연구소의 소장이 되었고 이후 스딸린 캠프에 가담하여 부하린의 조직자본주의론에 대한 주요 비판자로 활약했다. 원래 소규모 프로파겐다 기관에 불과하던 이 연구소는, 1929년 대공황 발생 이후, 스딸린의 후원 아래 비약적으로 성장하여 1931년 말에 이르면 소련 내 독점적인 서양 경제 연구기관으로 발전하였고, 1940년대 후반까지 스딸린주의 경제학을 대표하는 지위를 누렸다. 이 기간 동안 바르가와 그의 연구소 동료들은 스딸린과 당 지도부에게 세계경제 동향을 분석하는 보고서를 정례적으로 제출하였으며, 특정한 주요 국제정치 관련 현안들에 대해서도 자문 역할을 수행하였다. 1930년대 초·중반 바르가와 그의 연구소는 스딸린과 당 지도부의 요청으로 대공황에 대한 일련의 보고서들을 작성하게 된다. 이 보고서들은 몰로또프와 스딸린의 공식 석상 연설문에 반영되었고 그 중 일부는 정치권의 후원으로 출판될 정도로, 소련 당 지도자들에 가장 근접해 있었던 자료들 중 하나이다. 이들은 대공황에 대한 일반적인 논평이나 프로파겐다 수준의 글들은 아니었으며, 바르가와 그의 연구소의 독특한 경제학이 녹아 있는 과학적 연구물들이었다. 바르가 집단의 경제학은 당시 서양학계와 맑스주의 지성계에서 각광 받던 경제 위기이론들과 방법론들을 발전시켜 대공황의 기원과 발전방향의 문제를 탐구하는 학문적 시도였다. 본고는 바르가 집단의 보고서들을 하나의 텍스트로 간주하고 이를 근래 지성사에서 자주 이용하는 담론 분석 방법론을 통해 탐구할 것이다. 경제사상간의 개념적 연결고리에 주목하고 텍스트의 내용 분석에 집중하는 전통적인 사상사적 접근법을 무시하지는 않으면서, 보다 그것의 형식과 구조에 주목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본고는 바르가와 그의 연구소의 저작들이 만들어내고 스딸린주의 지도부가 공유했던 담론의 장(discursive field)을 드러내려 할 것이다.
[彙 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