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論 文]
포스트모더니즘의 회의론 논의와 역사인식의 객관화를 위한 학습의 모색
全 炳 喆
1. 머리말
2. 객관적인 역사인식과 포스트모더니즘의 회의론
3. 객관적인 역사인식과 객관화의 가능성
4. 역사인식의 객관화를 위한 학습의 모색
5. 맺음말
역사교육은 객관적인 인식을 제시할 줄 알아야 한다. “역사교육은 역사를 소재로 인간을 교육하는 활동이다”라고정의할 때에도 여기서 역사는 곧 ‘주관적인’, ‘자의적인’ 인식이 아닌 ‘객관적인’, ‘보편적인’ 인식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주관적으로 이루어진 ‘교과서 포럼’의 도서 등이 비판되고, 자의적이었던 일본 검정 교과서가 문제시된다. 새로운 역사교과서가 서술될 때에 여러 공청회와 심포지움이 개최되는 것도 보다 객관적인 인식을 담보하고자 함이다. 일찍이 하이햄(J. Higham)도 역사교육이 객관적인 사실을 추구해야 한다면서 사실의 정확한 파악과 객관적인 이해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였고, 다니엘스(R. V. Daniels)도 역사적인 전망을 통해 조성되는 객관성의 정신 속에서 가르쳐지고 학습될 때 올바른 학습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역사교육이 보다 객관적인 인식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인 역사인식의 가능성은 포스트모던적인 역사관에서 회의된다. 이들의 논리에 따르면 역사란 곧 문학과도 유사하다. 무엇이 진실이고 허구인가를 가릴 수 있다고 주장해 왔던 전통적인 역사는 허구일 수밖에 없다. 모든 역사는 언어적인 구성물로써 역사의 대상이란 것 자체가 존재하지도 않으며 객관적 인식도 존재할 수 없다. 더욱이 역사는 지배와 권력의 메커니즘으로서 거대 서사라 할 수 있다. 이제 역사교육에서 도달해야 할 객관적인 인식도 사라지고 만다. 무엇이 객관적인 인식인가를 찾기 위한 노력도 허무할 뿐이다. 역사를 과거의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텍스트로 보아야 한다는 논리에서 수업이 이루어진다. 예컨대 역사 자체를 문제화하는 수업이 그것이다. 이론과 지식이 생성되는 사회적, 언어적 관례와 메커니즘, 그리고 이것이 작용하는 권력 관계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역사화’의 방법이다. 이는 곧 해체의 관점에서 인식론적인 수업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고, 실제로 그것은 역사의 이데올로기성 등 인식적인 특성을 드러내는데 크게 유용하였다. 그렇지만 역사교육은 인식의 객관성 측면에서도 논의될 필요가 있다. 포스트모던적인 가치를 일정 부분 인정해야겠지만 역사학은 여전히 객관적인 인식을 다루고자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역사가들은 역사적 본질을 찾고자 한다. 해체를 넘어 객관정신을 가지고 참다운 것이 무엇인가를 집요하게 밝히고자 한다. 그것은 역사가와 과거 사이의 대화에서 나오는 것인 동시에 개연성의 기준을 공유하는 탐구 공동체의 산물이다. 절대적인 객관성은 ‘고귀한 꿈(noble dream)’ 일가능성이 많다고 하더라도, 그 꿈의 이상에 근접하고자 하는 노력마저 부정될 순 없다. 실제로 많은 역사적 사건들은 역사가들의 연구와 논의의 진전을 통해 보다 명확하게 규명되어져 간다. 적어도 그들의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면 객관성의 가능성도 인정될 수 있고, 따라서 역사교육도 이러한 가능성 속에서 인식적인 학습의 가능성을 논의해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본고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회의론을 논의하면서 역사인식의 객관화를 위한 학습 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역사인식에서의 객관성 개념과 함께 이를 회의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장들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객관적인 역사인식의 가능성을 객관화(objectification)의 논리에서 검토하게 될 것이다. 끝으로 역사교육에서 객관적인 인식의 문제가 왜 중요한지를 살펴보고 역사인식의 객관화를 위한 학습의 방안도 모색하게 될 것이다.
다문화주의 관점에서 7차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 내용분석
趙 倞 敏
1. 머리말
2. 세계사교육과 다문화교육
3. 다문화주의 관점의 세계사 교과서 분석틀
4. 분석 결과
5. 논의 및 결론
국제결혼과 외국인 근로자, 새터민 등으로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 급속하게 다양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다문화교육의 필요성은 점점 커지고 있다. 다문화가정 출신의 아동들은 학교에서 말씨, 피부색, 문화 등의 차이로 따돌림, 학습결손, 부적응 행동을 보이면서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타민족, 타문화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교과서 서술로 대변되듯 학교교육이 단일 민족 문화를 지나치게 강요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다문화교육이 학교교육과정에 반영된 직접적 계기는 교육인적자원부가 2006년도에 ‘다문화가정 자녀 교육지원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비롯되었다. ‘2007 개정 교육과정’에는 범교과 주제의 하나로 ‘다문화교육’을 도입하였고 2006년 4월 28일, 발표된 ‘다문화가정 품어 안는 교육지원 대책’이라는 보도 자료는 현행 교과서에 담긴 순혈주의와 관련된 구절을 소개하면서 순혈주의와 편견으로 인하여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에 ‘다문화와 인권을 강조하는 교과서’를 개정해 나갈 계획임을 제시하였다. 2007년 3월에 발행한 5, 6학년 도덕교과서에는 혼혈아와 입양아의 문제가 예제로 등장하였다. 다문화교육의 문제점으로 ‘국제이해교육’과 ‘다문화교육’의 개념 혼동을 들고 있는데 ‘2007 개정 교육과정’도 ‘국제이해교육’과 ‘다문화교육’의 개념을 구분하지 않고 범교과 주제로 모두 포함시키고 있다. 다문화주의는 성별, 종교, 직업, 계층, 인종 등에서 비롯되는 각 사회집단들의 고유한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주류 또는 비주류 집단들의 문화를 동등하게 여기고 존중하는 것으로 평등성과 관련이 깊으며, 이러한 다문화주의를 청소년과 그의 가족들에게 교육시키는 것을 다문화교육이라 한다. 지구촌 다문화교육은 다문화교육의 이념을 국가의 영역에 한정짓지 않고 지구촌 전역으로 연결·확대시킨 개념이면서 국가별 문화적 차이와 아울러 각 나라에 공통되게 존재할 수 있는 개별 문화집단들의 다양성에 더욱 초점을 둔 개념으로, 뱅크스(Banks), 모리스(Moris), 린치(Lynch), 베이커(Baker), 데이비드먼(Davidman) 등의 학자들은 지구촌 다문화교육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린치는 지구촌 다문화교육이 세계의 다양한 문화를 인식하는데 있어서 국제교육과 다문화교육 이 두가지 접근방법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양한 문화 속에서 인식되는 문화적 우월감과 열등감, 이와 관련된 문화적 편견은 국제교육이 추구하는 정의와 인권 등 보편적 가치의 형성에 부정적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문제는 세계의 다양한 문화를 이해하고 수용하여 문화를 초월한 세계적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자질을 함양하려는 다문화교육을 통해 해결이 가능하므로 국제이해교육과 다문화교육은 상호보완의 관계이며, 이것이 지구촌 다문화교육이다. 우리나라의 다문화교육의 문제점은 주로 소수 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동화주의적 교육내용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소수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동화주의적 다문화교육은 주로 이주민 지원단체의 현장에서 실시되고 있다. 이주민 지원단체의 현장에서 실시되고 있는 다문화교육은 연속기획보다는 일회적 교육으로 끝나며, 다른 나라의 역사와 민속, 종교, 예술 등에 대한 문화적 이해보다는 음식체험, 문화체험, 놀이체험이 대부분이고, 교육주체가 교육·문화계와 같은 전문기관이 아닌 이주민 지원단체로 다수자 변화에 대한 관심도 부족하다. 또한 다문화교육 내용에 대한 연구가 부진하여 국제이해교육 프로그램을 모방하거나 각종 일회성 행사들로 짜여져 있으며, 교육과정의 변화를 도모하거나 다문화가정 자녀가 있는 학교나 교실에서 교과를 가르칠 때 변화되어야 할 교육내용에 대한 것들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이주자를 한국 사회에 적응시키려는 교육적 열의는 높지만, 한국인들이 이주자에게 적응해야 한다거나 이주자 공동체 내의 갈등을 해소하는 교육의 필요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즉 다문화교육의 목적, 교육내용, 교육방법에 대한 많은 실제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교육계가 중심이 되어 장기적 계획 하에 다수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다른 나라의 역사와 민속, 종교, 예술 등에 대한 교육과정을 통한 다문화교육의 실시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회구성원을 대상으로 하는 다수자 대상의 소수자 이해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며, 교육내용은 행사활동이나 문화체험, 기초학습 능력 습득에서 벗어나 다문화와 관련된 내용이 많은 국어, 사회, 역사, 도덕 교과를 통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현대세계는 모든 국가나 사회가 서로 긴밀하게 하나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지만 상대 문화에 대한 무지와 불신, 자민족·자문화 중심주의로 인한 국가 간·민족 간·종족 간·종교 간의 갈등과 분쟁은 정치, 경제, 군사, 종교적 문제와 결부되어 그치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다문화주의 관점의 세계사교육은 서구 외의 다른 문명들과 인종집단들을 충분히 대변할 수 있고, 역사적으로 세계의 여러 문화들이 서로 접촉, 교환, 상호의존하며 끊임없이 존재하여 왔고 오늘날 세계문화 형성에 기여하였다는 점을 강조하여 문화적 우월주의를 배격하여 현대세계의 문제해결에 기여할 수 있다. 그리하여 교육계가 중심이 된 학교의 정규 교육과정에서 다수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다문화교육 관련 과목으로 세계사는 적합한 교과라고 할 수 있다. 여러 교과들 중에서 세계 여러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어 다문화관련 내용이 가장 많은 교과이기 때문이다. 다문화주의 관점이 현행 7차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 잘 반영되어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는 세계사 교과서의 분석틀이 필요하다. 그러나 분석틀에 대한 연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7차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를 다문화적 관점에서 내용분석한 연구도 없다. 이에 대한 답을 내리기 위해서 선행연구를 통하여 다문화교육의 내용요소를 추출하였다. 이러한 다문화교육의 내용요소를 준거로 세계사 교과서의 분석틀을 제시하고 그 틀로 세계사 교과서의 내용을 분석하였다.
제7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의 오리엔트 문명 서술 분석
- 오리엔트 문명 일반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내용을 중심으로 -
李 東 奎
1. 들어가는 말
2. 단원별 내용 구성 및 위치 분석
3. 본문 서술 내용 분석
4. 학습 관련 자료 분석
5. 2007 개정 교육과정에서의 오리엔트 문명
6. 나가는 말
이 글은 현행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의 오리엔트의 문명에 대한 서술을 분석하고 검토하는 연구이다. 오리엔트 문명은 그리스 문명과 헬레니즘 문명, 로마 문명으로 이어지는 서양 고대사 흐름의 출발점에 위치하며, 인류 역사에 있어 처음으로 도시의 형성과 문자 기록이 시작된 인류 문명의 출발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오리엔트 문명에 대한 교과서의 기술은 보다 정확성을 추구해야 하며 문명의 시초에 대한 새로운 연구 성과의 반영이 절실히 필요하다 할 것이다. 본 논문의 고찰을 통해 나타난 것은 현행 교과서의 오리엔트 관련 서술에는 수많은 오류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가장 기초적인 용어의 사용이나 시대의 비정, 나아가 개인의 이름에 대한 오류까지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예를 들면 한 교과서는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을 남부 이라크의 수메르 지역에서 나왔다고 소개하며, 다른 교과서는 페르시아 왕가의 이름을 잘못 서술하고 있다. 또한 전체적으로 오리엔트 문명에 대한 최근의 연구가 반영되지 못하였고, 그 분량 역시 몇 페이지가 되지 않아 너무 왜소하다 할 것이다. 역사교과서에 있어 역사적 사실이나 용어 및 연대 등의 부정확한 표현과 서술, 잘못된 학습 자료의 수록 등의 문제는 비단 오리엔트 문명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현행 교과서에 대한 각 시기와 분야의 전문가들의 오류 지적은 결코 가벼운 문제라고 할 수 없으며, 교과서 집필이 보다 전문화 될 필요가 있다는 반증이라 할 것이다. 만약 이것이 여의치 않다면 최소한 각 시기와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하여 보다 정확하고 상세한 집필 기준을 제시한다든지, 보다 엄밀한 사후 감수를 통해 보완하여야 할 것이다. 세계사에 있어 오리엔트 문명에 대한 적절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우리는 세계사 교과서 전체의 단원 구성에 있어 아시아와 유럽의 이분법적 대립 구도가 서양과 비서양 사이의 역동성과 수동성, 진보와 정체, 침략과 저항이라는 이분법적 인식을 정당화하며 유럽을 문화 창조의 역동적 주체로 파악하도록 만든다는 주장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서양 역사의 시작에 있어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포함한 오리엔트 문명이 차지하는 영향에 대한 정확한 평가와 서술은 이런 이분법적 대립의 종식에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사 교과서 속의 미국
-제7차 교육과정 세계사 교과서를 중심으로 -
丁 慶 姬
1. 머리말
2. 근대 미국에 대한 기술
3. 세계 대전 시기의 미국에 대한 기술
4. 전후의 미국에 대한 기술
5. 맺음말: 보다 나은 세계사 교과서를 위한 提言
근래 우리나라의 세계사 교육은 학계와 교육계로부터 유럽 중심주의에 입각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최근에 출간된 『우리 눈으로 보는 세계사』는 현재 우리나라의 세계사 교육을 근원적으로 비판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려 애쓴다. 이 책은 부제--‘유럽 중심의 세계사를 우리 관점에서 비판한다’--처럼 세계사 교과서가 여전히 유럽 중심의 기술을 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보다 앞서 전국역사교사모임도 현행 세계사 교과서가 ‘유럽 중심주의’라는 문제점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그들이 대안교과서인『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를 쓰게 된 주된 동기는 ‘주연 유럽, 조연 중국’이라는 현행 교과서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현행 세계사 교육에 대해 비판적인 이들의 바람은 종래의 유럽 및 중국 중심의 세계사를 지양하고, 그동안 소외되어 온 동남아시아, 서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역사를 보강함으로써 새로이 균형 잡힌 세계사를 쓰는 것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균형 잡힌 세계사를 지향하는 우리나라 세계사 텍스트에서 예나 지금이나 제대로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미국과 일본의 역사다. 미국과 일본의 역사가 세계사 교과서에서 푸대접을 받고 있다는 것은 이 분야 전공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미국사와 일본사는 세계사 교과서뿐 아니라 국사 교과서 등에서도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먼저 국사 교과서에서의 일본에 대한 서술을 보면, 그 비중이 극히 작다. 중고등학교의 현행 국사 교과서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교과서의 현대사 편에서 일본에 대한 서술은 매우 인색해서, 일본에 대해 기술한 내용은 고등학교 국사가 네 문장, 중학교 국사가 두 문장뿐이다.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20세기 전반의 세계’ 및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세계’ 부분을 보면 중국사는 중시되는 반면, 일본사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일본에 대한 서술의 경우, 서술 비중도 문제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서술 내용이다. 현재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세계 인식에 입각해서 쓰였기에 전근대사 부분에서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았던 국명인 ‘중국’은 자주 등장하지만 7세기 후반에 왜국이 개명한 ‘일본’이란 국명은 찾기가 쉽지 않다. ‘왜’, 혹은 ‘왜구’라는 용어가 더 자주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국사 교과서에는 일본에 대한 적대감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즉 일본은 우리에게 여전히 잠재적 적국이라는 역사 인식이 고스란히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 역사 교과서는 이웃나라인 일본에 대해 단지 ‘침략자로서의 일본’이라는 과거의 이미지만을 제공할 뿐이며, 패전 후의 일본에 대한 이미지는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국사 교과서에서의 미국에 대한 서술도 마찬가지다. 현행 국사 교과서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한국현대사에 그토록 중요한 영향을 미친 미국에 대해서도 국사 교과서의 실제 서술 분량은 극히 미미하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의 경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의 역사 서술에서는 미국이라는 단어 자체가 거의 나오지 않고 있으며, 중학교 국사 교과서에서도 미국에 대한 서술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처럼 미국에 대한 서술 비중이 지극히 적은 것은 광복 이후 반세기 동안 미국이 한국에 대해 미친 커다란 영향에 비한다면 놀랍게 느껴질 정도라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국사 교과서는 아직 미국을 충분히 객관화하여 인식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세계사 교과서에서 미국은 과연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가? 본 논문에서는 역사를 균형 있게 바라보는 세계사 교과서를 지향한다는 커다란 전제 아래, 현행 고등학교 세계사 검정 교과서 3종의 미국에 대한 서술을 집중적으로 분석하려 한다. 제7차 교육과정의 세계사 교과서는 미국에 대해 어떠한 역사인식을 보여주고 있는가? 다시 말해서 세계사 교과서 속에 드러난 미국의 이미지는 무엇인가? 또한 세계사 교과서는 미국의 역사를 국제적인 맥락 속에서 파악하고 있는가? 이것이 본 논문에서 답해보려는 의문들이다. 단, 분명히 할 것은 본 논문의 분석이 교육현장에서 세계사 교과서를 다룰 때 생기는 문제점을 역사교육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사라는 역사학의 입장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현행 세계사 교과서를 이전의 세계사 교과서와 비교하여 미국에 대한 서술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검토하는 작업은 본 논문에서는 시도하지 않았다. 여기서는 현행 고등학교 세계사 검정 교과서 3종의 미국에 대한 기술, 즉 내러티브에 초점을 두어 분석하되,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는 기술이 발견된 경우에 가능한 한 수정의 방향을 제시하거나 기존의 기술을 대체할 새로운 기술 내용을 제시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는 본 논문의 목적이 현행 세계사 교과서의 미국에 대한 서술 내용을 비판적으로 검토·분석함으로써 모두가 지향하는 좀 더 바람직한 세계사 교과서, 즉 균형 잡힌 세계사 교과서의 서술 방향을 모색하기 위한 하나의 提言이 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국가 수준의 대학 입시 국사 문항에서 오답시비 유형 분석
金 秀 美
1. 머리말
2. 국사 문항의 경향과 오답시비 사례
3. 국사 문항 오답시비의 유형
4. 국사 문항 오답시비의 유형 변천에 따른 시사점
5. 맺음말
국가 수준의 대학 입시가 본격화된 예비고사에서부터, 학력고사, 그리고 현재의 수능으로 변천함에 따라 국사 문항에서도 오답시비가 가능한 문항을 유형화 시킬 수 있고, 그 유형이 변화하였다는 것에 착안하였다. 국사 문항에서 오답시비 가능성의 유형은 문항의 구성 요소인 문두, 제시문, 답지를 문항 단위로 풀이하면서 오답시비가 가능한 문항을 발견하고 이를 귀납적으로 범주화하였는데, 문두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 역사적 평가에 대한 질문인 경우, 답지 표현이 분명하지 않은 경우, 제시문을 가지고 정답을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 연구 성과의 축적에 따라 정답이 달라지는 경우, 고등학교 교육과정과 학술적 근거가 불일치하는 경우로 분류하였다. 오답시비의 6가지 유형과 변천에 따른 시사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문두가 분명하지 않아 오답시비가 가능한 문항은 예비고사와 학력고사에서만 볼 수 있었다. 즉 문두가 분명하지 못하여 출제의도가 수험자에게 정확히 전달되지 못한 유형으로 문항 제작의 수준이 낮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수능으로 오면서 문두의 불분명함으로 인한 시비는 볼 수 없었다. 문두가 모호하면 오답시비가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문두는 정교하게 구조화하고 분명하게 제시함으로써 오답시비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둘째, 역사적 평가에 대한 질문인데 문두에서 역사적 사건이나 사실에 대한 영향이나 결과에 대해 다양한 해석으로 발생할 수 있는 오답시비 유형으로 예비고사와 학력고사에서만 볼 수 있었다. 평가자의 관점에 따라 충분히 견해의 차이를 보일 수 있는 문항이 교과서 서술 내용을 기반했다고 하여 준거가 되는 것은 문항의 질적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수능에서는 역사적 평가에 대한 문항이 결론 도출 및 평가 문항으로 출제되는데, 자료를 종합하고 일반화하여 결론을 도출하는 문항이 출제의 어려움은 있으나 참신한 문항으로 개발되어야 한다. 셋째, 답지 표현이 분명하지 않은 경우도 오답시비가 가능하다. 답지가 문장 진술이나 개념어라 하더라도 답지가 불분명한 경우가 있다. 수능에서는 제시문을 분석하는 문항의 경우 정답을 고를 수 있거나 오답을 제거할 수 있는 단서를 준다든지, 국사 선지식을 모르더라도 제시문의 문맥만 제대로 파악하여 언어적 연상이 주는 추측요인으로 정답을 고를 수 있다는 점 등이 단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넷째, 제시문만 가지고 정답을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이다. 사고력을 측정하는 수능 국사 문항에서는 제시문(지문)이 필수 구성 요소이지만 제시문으로는 정답을 찾기 어려운 문항이 있다. 이러한 유형은 제한된 문두와 제시문만 가지고는 단서가 부족하여 정답을 찾을 수 없거나 제시문의 내용이 정답을 한정하지 못하는 경우, 교과서의 사실과 제시문의 특수적 자료의 사료 해석이 다른 경우 오답시비가 있을 수 있다. 제시문 선정은 문항의 질을 좌우하는 중요한 여건이므로 문두와 제시문이 긴밀성을 갖는 제시문 개발이 필요하다. 다섯째, 연구 성과의 축적에 따라 정답이 달라지는 경우인데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가 1980년대에 주로 축적되고 교과서의 반영은 1990년대에 되다보니 학력고사 문항에서 발견된다. 이는 연구 성과에 비추어 정답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데 역사적 사실이 재해석되는 국사 과목의 성격이 드러나는 문항 유형이라 할 수 있다. 여섯째, 고등학교 교육과정과 학술적 근거가 불일치하는 경우인데 국가 수준의 대학 입시 문항에서 계속 제기 되고 있는 유형이다. 교과서 내용과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범위 안에서는 정답이지만 학술적으로 깊이 있게 들어가면 정답이 없다는 시비도 발생하게 될 수 있는 문항 유형으로 교과서에 있는 내용의 오류 또한 지적하고 학술적 근거까지도 명확하게 검증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辰國의 變轉과 ‘辰王’의 史的 推移
徐 毅 植
1. 序 言
2. 後漢書 辰國·辰王 記事의 點檢과 理解
3. 辰王 共立 政治體制의 變轉과 辰國
4. 渠帥層의 王者的 性格과 ‘辰王’의 史的 推移
5. 結 語
三國의 국가 형성 과정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것이 三韓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그러나 삼한에 대해 우리 측에서 남긴 기록이 전무하다시피 한 형편이어서, 第三者로서의 관점과 흥미에서 傳聞 내지 轉聞을 기록한 것인 데다 誤·脫字가 적지 않아 더러는 文意마저 알기 어려운 中國 문헌에 의지하여 삼한 문제에 접근하다보니 몇몇 사실의 이해에서는 서로 견해가 갈리고 관점이 어긋나 피차 납득하기 곤란한 三韓 社會相을 제시하는 경우도 생긴다. 辰國 및 辰王을 둘러싼 이해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진국·진왕에 대한 이해의 分岐는, 三韓 諸國이 모두 옛 진국에서 나왔으며 진왕은 삼한 전체의 왕이었다는 『後漢書』의 기록을 신뢰하여 사실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의 여부에서 시작되었다. 이 『후한서』의 기사가 『三國志』와 상치하는 것처럼 보이는 데 문제가 있었던 것인데, 『삼국지』에는 辰韓이 옛 진국이라고만 서술되어 있을 뿐 삼한이 모두 진국에서 나왔다거나 진왕이 삼한 땅 전체의 왕이라는 내용이 없다. 따라서 후대의 撰述인 『후한서』가 『삼국지』의 기사를 恣意的으로 變改한 것이라고 판단하는지 아니면 나름대로 그렇게 쓴 典據가 따로 있었으리라고 생각하는지에 따라 견해가 갈리게 되었다. 게다가 『삼국지』 자체 내에서도 月支國을 다스린다는 辰王과 弁·辰韓 24국 중 12국이 속해 있다는 辰王이 竝述되어 있어, 兩者가 같은 존재를 지칭한 용법인지 아닌지를 둘러싸고서도 다시 의견이 나뉘었다. 삼한으로 分立하기 전에 그 땅 전체를 다스린 辰王의 辰國이 실재했다는 견해부터 진국이고 진왕이고 모두 추정과 상상의 결과로 만들어진 문헌상의 존재일 뿐 실체가 아니라는 견해까지 異論의 스펙트럼이 대단히 폭넓게 분포한다. 하지만 그동안 연구가 진행되면서 대체로 『삼국지』의 사료 가치를 더 높이 인정하는 쪽으로 논의가 정리되어 왔다. 진국과 진왕이 존재했다는 것은 사실로 인정하면서도 삼한이 진국에서 나왔다든가 ‘盡王三韓之地’한 辰王이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뚜렷해진 것이다. 『후한서』의 기사는 단지 후대에 성립한 인식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실제의 역사 사실과 구분해서 파악해야 한다는 생각이 논의의 기저를 이뤘다. 그러나 이는 관련 자료를 새로 발견했다거나 딱히 이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논리적 근거를 확보한 결과는 아니었다.『삼국지』가 『후한서』보다 약 150년 앞서 편찬된 사서라는 점을 중시하고 삼한의 70여 개 소국에 앞서 그 전체를 統轄한 대국이 먼저 존재했을 개연성은 희박하다고 판단한 결과일 뿐이었다. 記事를 字句대로만 읽고, 삼국의 국가 형성 과정을 이해하는 데 서구 인류학의 社會發展段階論을 仍襲的으로 적용해 온 끝에 도달한 필연적 귀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논의의 방향이 이렇게 쏠리고 보니 크게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생겼다. 하나는 삼국 이전의 사회 상태를 古代에 이르지 못한 원시공동체 단계로 파악하게 됨으로써 古朝鮮에서 三國으로의 進展에서 繼起性을 부인하게 된 것이고, 또 하나는 이런 認識의 歸結로서 黃河文明과 뚜렷이 구분되는 大凌河·遼河 流域의 獨自的 高度文明(이른바 ‘遼河文明’ 혹은 ‘渤海文明’)에 대한 이해 능력을 상실하여 제 역사를 세계사적 전망 위에서 파악할 기반을 沒却하게 된 것이다. 신라가 원시 촌락 몇이 결합하여 세운 사로국의 발전 형태로 규정되고, 나아가 고조선 아닌 사로국이 한국사의 기원으로 파악되며, 삼국 중 고구려는 물론 그 성립 배경으로서의 고조선 또한 한국사의 전개와는 ‘객관적으로’ 무관한 존재로 이해되기에 이른 현실이 문제의 현주소를 말해 준다. 筆者는 그동안 고조선 사회의 계기적 발전이라는 맥락에서 삼국의 성립 과정을 파악하지 않으면 한국고대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누차 지적해 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삼국지』와 마찬가지의 비중을 두고 『후한서』의 기사를 적극 활용하는 연구 자세를 견지하였다. 두 기록을 동시에 충족하는 방향에 역사의 진실이 놓여 있으리라 생각한 때문이었다. 兩者擇一的인 史料 運用은 恣意的 判斷을 부추기기 쉽다. 이러한 見地에서 本考에서는『후한서』의 사료적 가치를 정면에서 살피고, 그 토대 위에서 辰國·辰王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확대해 보고자 한다. 어느 견해든 그것이 확실한 근거 위에서 구축된 이해체계라면 응당 받아들여야 마땅하겠지만, 砂上樓閣이라면 가급적 조속히 철거하여 역사의 본모습을 복원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릇되었음을 알고서 그것을 바꾸는 데 주저하거나 지체해서는 안 된다.
朝鮮前期 祿俸의 頒給과 官僚家計
申 幼 兒
1. 序 言
2. 祿俸의 授受와 君臣의 義理
3. 祿俸의 財源磨鍊과 制度修整
4. 祿科額과 官僚家計
5. 結 語
祿俸은 왕조국가에서 관료에 대해 그 職事에 종사한 대가를 지불하는 물적 보상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관료에 대한 대우는 수조권을 누릴 수 있는 토지를 지급하는 방식과 정기적으로 현물을 지급하는 녹봉의 방식, 두 계통에서 이루어져 왔다. 양자는 관료의 직무수행과 관련한 보상이라는 점에서 기본 성격이 유사하였으나, 그 의미와 제도의 운영 방식은 달랐다. 양반관료에게 토지의 분급은 職에 대한 대가인 동시에 世臣으로 대우하는 世祿이었기 때문에 퇴직 후나 사망 후에도 守信田·恤養田의 형태로 傳授가 허용되었다. 따라서 현직에 있는 관료에게는 실제로 職事를 수행하는 것에 대한 보상을 별도로 해주기 위해 품급에 따라 米·布 등 현물이나 저화와 같은 화폐를 줌으로써 그 수입이 토질이나 작황에 따라 좌우되는 것을 막아 관료의 생활을 안정시켜야 했다. 科田 외에 따로 녹봉을 절급한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양반 관료에게 토지와 녹봉을 모두 지급하는 제도는 조선 명종 11년(1556)에 토지에 대한 수조권 분급이 폐지됨으로써 중단되었고, 이후 관료에 대한 대우는 녹봉으로 일원화되었다. 그러므로 녹봉이 관료의 생활에서 수행하는 역할은 실로 적지 않았고 국가 재정에서 점하는 비중 역시 상당하였다. 녹봉이 국가와 관료에게 갖는 비중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토지 분급에 관한 연구는 많이 있었던 데 반해, 녹봉에 관한 연구는 부진하였다. 녹봉에 관한 연구는 그 시기가 주로 고려시대에 집중되어 있었고, 내용은 職窠別 녹봉규정에 대한 해명에 그쳤다. 조선전기 녹봉제도에 관한 연구도 중점을 그 지급 대상의 분류와 녹봉의 지급 절차,『경국대전』에 기재된 受祿 대상별 科額 제시에 두었고, 연구 방향은 녹봉제도의 정비과정을 체아직의 설치와 더불어 관료제가 문란해져 가는 과정으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녹봉제의 윤곽은 대강 밝혀졌으나 새로 이해하고 구명해야할 국면들이 상당히 남아있다. 녹봉이 지녔던 다양한 가치 및 녹봉의 財源, 녹과액이 관료 家計에서 수행하였던 역할 등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본고는 이에 주목하여 녹봉을 통하여 매개되었던 군신간의 관계, 국가가 관료의 녹봉으로 인해 부담하였던 비용 및 그것이 국가재정 속에서 점하는 비중, 국가의 처지와 형편에 따라 변화된 녹봉제의 정비내용, 녹과액이 시중 물가에 비추어서 가졌던 가치와 규모, 녹봉을 통하여 얻어진 관료의 소득과 그 생활상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이렇게 하면 조선전기 녹봉제의 실체에 한 걸음 더 접근해 볼 수 있고, 조선왕조가 국가를 經理해 나간 원리와 관료제 국가로의 진전을 한층 실제에 가깝게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朝鮮後期의 鄕村防衛實情과 民堡論
河 明 埈
1. 序 言
2. 鄕村防衛實情과 그 課題
3. 民堡防衛論의 定立과 影響
4. 結 語
조선후기는 양란 후의 대내외적 혼란을 수습하는 것을 과제로 하고 있었다. 이른바 國家再造의 問題였다. 이에 정부는 사회·경제적 발전을 촉진시켜 국가적 역량을 제고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였다. 군사 전반에 대한 조정도 뒤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중앙군의 戰力을 더욱 증강시키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17세기 후반 五軍營體制의 확립은 그러한 노력의 소산이었다. 하지만 중앙위주의 군사정책은 상대적으로 지방군의 허소화를 초래하는 배경이 되었다. 지방군은 국방의 일선에 위치하여 外敵을 방어함과 동시에 內亂을 진압하고 향촌민을 통제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으므로, 지방군의 기능 저하는 향촌방위를 위태롭게 만드는 중대 사안이 아닐 수 없었다. 이는 국가의 존립과 보전에도 직결되는 사항이었다. 그런데 조선후기 지방군의 허소화는 단순히 군사부면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즉 신분제와 부세제도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태 해결의 복잡성은 여기에 있었다. 당시의 官人·儒者들은 지방군의 허약을 국가의 총체적인 위기로 간주하면서 이를 수습·타개하기 위한 방안이 절실하다는 점에서는 대체로 인식을 같이하였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고 실천하는 측면에 있어서는 논자의 당색이나 신분적 처지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또한, 지방군의 역할과 상관되는 民亂의 진행 정도나 대외관계의 안정 여부에 의해서도 그 대책의 범위와 강도는 달라질 수 있었다. 따라서 지방군의 약화 문제를 처리·극복하기 위해 제시된 政論家들의 鄕村防衛策을 검토하면 전통 국방사상에 대한 계통적·단계적 이해의 폭과 깊이를 더하고 아울러 그것을 배태한 朝鮮後期의 歷史像을 계기적·종합적으로 파악하게 하는 단서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와 같은 鄕村防衛策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茶山 丁若鏞이 제시한 民堡論이다. 다산은 19세기 초반 통신사 교섭이 난항을 겪는 것을 일본 침략의 前兆로 간파하고 그 대비책으로 자신의 鄕村自衛論이 집약된『民堡議』를 저술하였다. 이 저작은 在來의 향촌방위책을 정리·소화하고 당대의 군사역량 및 향촌사회의 동향을 고려하는 가운데 案出된 것이었다. 이후 다산의 민보론은 19세기 중반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이 본격화되는 시기에 공식적인 국가 비변책으로 채택되었으며, 韓末에 이르기까지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런 까닭에 다산의 민보론을 중심으로 그 전후의 향촌방위책을 살펴보게 되면 앞서 언급한 所期의 성과를 어느 정도 거둘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간 다산의 민보론에 관한 연구는『민보의』의 작성 배경, 내용, 의미, 영향, 성격에 대해 전반적인 사항을 설명하고, 거기에 더하여 귀중한 견해와 시사를 제공해 주었다. 이제는『민보의』가 제출되고 국가적으로 그 적용이 강구될 수 있었던 제반 요인을 조선후기의 군사정책과 향촌방위책, 사회적 동향, 거시적인 역사 전개 양상과 결부시켜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그 속에서『민보의』의 시대적 의미를 摘出하는 것이 과제이다. 이에 대해 本稿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성을 통해서 다산의 민보론을 보다 면밀하게 검토하고자 한다. 첫째, 중앙위주의 군사정책 등으로 인한 지방군의 허소화 실태를 진단하고,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하여 향촌자위책이 요청되는 사정 및 그 대책의 내용을 계통에 입각해서 밝힐 것이다. 둘째, 19세기적인 內憂와 外患의 상황에서 재래하는 향촌방위책을 집성하여 정립된 민보론의 목표 및 기반, 골격과 승계 사정을 구명하고자 한다.
한말 근대개혁의 추진과 ‘格物致知’ 인식의 변화
具 姬 眞
1. 서언
2. 東道西器정책과 ‘格致學’
3. 갑오개혁 이후 근대국가를 위한 사상과 학문의 모색
4. 광무개혁기 ‘유교(國敎)’·‘격치’의 분리와 변용
5. 결어
한말 근대개혁의 추진과 더불어 사상, 학문, 교육에도 변화가 진행되어갔다. 유교를 학문과 교육의 근간으로 하였던 우리나라 중세에서 인식과 수양은 ‘格物致知論’에 근거하였다. 이는 인륜과 도리를 중심으로 궁리하는 가치체계이고, 物理를 道理에 종속시켜 파악하여 우주·자연·인생을 도리를 중심으로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인식체계였다. 그리고 격치는 치국·평천하의 근간이었으므로 치자층의 입장에서 학문의 사회적 역할을 규정하였다. 이러한 사상체계는 조선후기 봉건사회의 해체와 더불어 변화하였고, 근대개혁의 추진과 함께 변용·해체되어 근대적인 사유구조로의 전환이 이루어져갔다. 본고는 국교확대이후 광무개혁기까지 근대개혁의 추진과 더불어 근대적 사유구조, 학문구조가 형성되어가는 과정을 동도서기·구본신참 개혁을 추진해가는 계열의 격물치지에 근거한 사유의 변화를 중심으로 살펴보려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이 우리사회에서 근대적 사유체계의 형성과정과 특징의 일단을 밝히는데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근대개혁기 전통적 사유의 변화과정에 대한 연구는 세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첫째는 개별 인물, 특정 지역 지식인들의 사유의 변화를 규명하는 것이다. 둘째는 ‘동도서기’, ‘변법론’ 등이 전통사상에 근간한 개혁론으로 연구되었다. 셋째로는 주로 국권회복운동기에 이루어진 구학과 신학의 논쟁을 중심으로 전통학문과 신학문의 갈등과 의의를 규명하는 것이었다. ‘개화사상’, ‘개화파’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반면 이 분야에 대한 연구는 소략하다. 지금까지의 연구로 전통적 사유의 변화에 영향을 주었던 서구의 사상, 근대적 사유의 전반적인 수립과정, 근대개혁론 등이 대략적으로 밝혀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구체적인 사유양식의 변화를 규명하며 내적 발전과정을 체계화하는 연구는 출발단계로 보인다. 유교사상에서 ‘격물치지’는 인식방법, 가치체계, 학문의 주체와 역할을 규정하는 것이었으며 근대사상의 형성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국교확대이후 동도서기정책이 추진되면서 ‘西器’로써 수용되었던 서양근대의 과학적 인식과 학문은 ‘格物致知’, ‘格致學’으로 소개되며 格致라는 용어와 인식을 대체해갔다. 이후 대한제국은 근대문명에 의해 뒷받침된 제국주의 침략의 위기에 대응해서 구본신참의 개혁을 추진하면서 동도서기를 ‘유교’와 ‘격치’로 분리하여 각각의 역할을 정했다. 또한 대한제국의 변통을 촉구하던 개신유자들은 ‘격물치지’를 조선후기 실학을 계승하여 근대개혁에 임하는 자세로 재해석하기도 했다. 이처럼 격치라는 용어와 격물치지에 근거한 사유를 변용하면서 근대적 사유를 형성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본고는 한말 근대개혁의 추진과 더불어 진행되고 있었던 근대적인 사유체계의 수립을 ‘격물치지’에 근거한 도리중심의 가치체계, 우주·자연·인생을 도리를 중심으로 통합적으로 파악하며 물리를 도리에 종속시켜 이해하는 인식방법, 학문과 지식의 주체와 역할에 대한 사유의 변화를 통해서 규명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다음과 같이 세분화해서 살펴보겠다. 첫째로, 1880년대 조선정부가 ‘東道西器’적인 개혁을 추진하면서 진행되었던 격물치지인식의 전환을 살펴보겠다. 조선정부는 주로 중국을 통해 서구의 기술과 학문을 수용했는데, 이는 ‘격치학’으로 소개되었다. 서구근대의 과학과 기술이 ‘격치학’으로 소개되었던 배경과 이해의 실태 그리고 영향을 살펴보겠다. 이처럼 격치학의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儒者가 갖추어야할 학문과 교육에 대한 인식에 변화가 생겼다. 격치학은 治者의 학문을 함의하였으므로 고등교육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변화를 살펴보겠다. 그리고 조선정부의 동도서기정책이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와는 다른 방향으로 근대개혁 방안을 구체화하는 지식인계열이 있었으므로 이들의 격치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겠다. 둘째로, 개화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갑오개혁이 학문과 교육에 끼친 영향과 이후 근대국가체제를 뒷받침하기 위한 학문과 사상이 모색되는 과정을 살펴보겠다. 갑오개혁은 부국강병과 국민양성을 위한 학문과 교육을 모색했다. 이것이 어떠한 내용과 특징을 지니는지와 이 속에서 격치가 어떻게 변용되는지 살펴보겠다. 그리고 갑오개혁 중단 직후 유학과 전통교육기관의 개혁시도가 문명개화론자들에 의해 저지되는 과정과 문명개화를 지향하는 지식인들의 신학문중심의 논의가 대한제국초기에 파정을 맞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면서 전통학문과 신학문의 갈등과 대한제국의 국체를 뒷받침하는 사유가 모색되는 과정을 검토해보겠다. 다음으로, 1899년 대한제국의 국가체제가 정비되는 시기를 전후해서 대한제국정부와 개신유자들이 표방한 구본신참의 개혁이념과 연계하여 ‘격물치지’의 역할을 살펴보겠다. 대한제국정부는 전제군주국체를 토대로 근대개혁을 추진하려 하면서 이를 뒷받침하는 이념으로 ‘宗敎’와 ‘格致’를 분리하였다. 한편에서는 당면한 왕권과 국권의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도리중심의 가치체계를 고양하는 유교의 국교화를 추진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신학제에서 격치를 가르쳐 부국강병하려했다. 개신유자들은 대한제국의 대변통을 촉구하며 이념을 뒷받침해갔는데 구본신참의 변법론의 일환으로 격물치지를 조선후기 실학의 개혁자세와 연계시켜 이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권위기가 심화되면서 유자층을 중심으로 하는 담론의 성격을 가지며, 물질문명의 수립을 중심으로 이해되고 있는 격치에 주목하기보다는 국민의 역할을 중시하여 국민이 도리중심의 가치체계를 가지고 국권을 수호하도록 하는 방안이 모색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격물치지인식의 변용과 역할에 대해 살펴보겠다.
대한제국기 언론의 ‘종교사회’ 인식
金 鍾 俊
1. 머리말
2. 1904년 이전 ‘종교’ 인식과 ‘敎案’
3. 1904년 이후 ‘종교사회’에 대한 기대와 우려
4. 맺음말
개항기 서구문물의 수용에 발맞추어 ‘종교’와 ‘사회’는 각각 그 개념과 영역을 정립해 갔다. 또한 ‘종교사회’라는 용어로 결합되면서 ‘종교에 기반한 단체’를 지칭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종교사회’는 추상적으로는 ‘문명’, ‘애국’ 개념과 연관되고, 실제적으로는 ‘지역사회’, ‘외세의존’의 문제와 관련된다는 점에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본 연구는 대한제국기 주요 신문 자료에 나타나는 ‘종교사회’에 대한 인식을 살펴볼 것인데, 특히 당대 언론과 지식인들이 ‘종교사회’의 개념을 정립해가는 과정에서 ‘종교사회’에 기대했던 것과 실제 ‘종교사회’의 존재 양상 사이에서 발생하는 괴리에 주목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와 ‘사회’에 관해 개념사·사상사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종교사회’에 관한 담론사·사회사적 접근법을 채택하고자 한다. 한국 근대사에서 ‘종교’와 ‘사회’가 결합되어 ‘종교사회’로 사용될 때 언론이 이를 어떤 방식으로 이해했는가에 관한 문제를 다룬 연구는 없지만, ‘종교’와 ‘사회’ 개념의 정립 과정에 대한 연구는 일정하게 이루어져 있다. 먼저 ‘종교’는 1883년『한성순보』에서 처음 사용된 이래 ‘문명화’, ‘민족 정체성’, ‘인민교화’ 등의 관점에서 다루어졌다고 한다. 이 시기 ‘종교’는 ‘정치’, ‘교육’, ‘의료’ 등의 영역에서 분화 및 순수화 과정을 거쳤고, 신분적으로 대중화되기도 했다. ‘사회’의 경우 1896년 일본유학생에 의해 처음 사용된 이래『독립신문』에도 등장하나 아직 개념어로서 정착된 것은 아니었다. 1905년 이후에야 ‘사회’ 개념이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하는데 ‘사회 상층부의 국가 권력 독점을 막고 개명한 인민의 권력이 확장되어 가는 장’으로서의 ‘사회’ 개념(『만세보』), ‘국가를 가능케 하는 성립 기반’으로서의 ‘사회’ 개념(『대한매일신보』), ‘체계화·일반화·탈정치화하면서 국가와 구별’되는 ‘사회’ 개념(『수신 교과서』) 등으로 구분된다. 그런데 이 시기 실제 ‘사회단체’에 대해서는 ‘애국단체’와 ‘친일매국단체’의 이분법적 구분이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근에는 ‘매국단체’의 ‘사회’ 표방이 갖는 의미와 당대 언론의 대응에 관한 관심도 생겨났다. 이처럼 1900년대 말이 되면 ‘종교’와 ‘사회’에 대한 개념 정립이 오늘날과 거의 유사한 수준에까지 이르게 된다. ‘개인은 사회를 구성하는 원소이고, 사회는 개인이 생활하는 기관’으로 ‘문명을 증진시키고자 하거나 국력을 발휘코자 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정의나 ‘사회는 개인의 공동단체이고, 국가의 각종 부분’이라는 정의가 등장한다. 이처럼 개인과 사회, 국가의 관계가 정의된 후 이들 관계를 부패시키지 않고 凝結시키며, 환산시키지 않고 서로 注合시키는 것이 ‘종교’이며, 이는 곧 ‘도덕심의 배양’을 의미하는데 기존 종교인 유교가 그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개인과 국가 사이에 사회를 위치시키고, 3자를 정신적으로 엮어주는 역할을 종교에 기대하고 있으며, 이를 다시 ‘문명’과 ‘국가’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사회’, ‘단체’의 한 부분으로써 ‘종교사회’에 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은 1904년 이후의 일이다. 1904년 이전 언론의 ‘종교사회’ 인식은 일상적인 담론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았고, 특별한 사안이 발생했을 때 이에 대한 대응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이 때 ‘특별한 사안’의 하나로 ‘敎案’을 들 수 있다. 따라서 먼저 1904년 이전 언론사별 ‘종교’ 인식은 어떠하였고, 특히 ‘교안’ 사건이 어떠한 논리 구조 하에서 파악되고 있었는지 살펴보았다. 1904년 이후 언론은 ‘문명’과 ‘애국’, ‘지역사회’와 ‘외세 의존’의 관점에서 ‘사회’ 일반에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표하고 있었다. ‘종교사회’도 그러한 ‘사회’ 중 하나로 다루어졌고, 언론사별로 논조에서 일정한 차이를 보였다. 이 시기 ‘종교사회’에 관한 인식에서 언론사별 주요 강조점은 무엇이었는지 언론사별 유사성과 차이점에 유의하여 검토해 보았다.
[彙 報]
포스트모더니즘의 회의론 논의와 역사인식의 객관화를 위한 학습의 모색
全 炳 喆
1. 머리말
2. 객관적인 역사인식과 포스트모더니즘의 회의론
3. 객관적인 역사인식과 객관화의 가능성
4. 역사인식의 객관화를 위한 학습의 모색
5. 맺음말
역사교육은 객관적인 인식을 제시할 줄 알아야 한다. “역사교육은 역사를 소재로 인간을 교육하는 활동이다”라고정의할 때에도 여기서 역사는 곧 ‘주관적인’, ‘자의적인’ 인식이 아닌 ‘객관적인’, ‘보편적인’ 인식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주관적으로 이루어진 ‘교과서 포럼’의 도서 등이 비판되고, 자의적이었던 일본 검정 교과서가 문제시된다. 새로운 역사교과서가 서술될 때에 여러 공청회와 심포지움이 개최되는 것도 보다 객관적인 인식을 담보하고자 함이다. 일찍이 하이햄(J. Higham)도 역사교육이 객관적인 사실을 추구해야 한다면서 사실의 정확한 파악과 객관적인 이해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였고, 다니엘스(R. V. Daniels)도 역사적인 전망을 통해 조성되는 객관성의 정신 속에서 가르쳐지고 학습될 때 올바른 학습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역사교육이 보다 객관적인 인식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인 역사인식의 가능성은 포스트모던적인 역사관에서 회의된다. 이들의 논리에 따르면 역사란 곧 문학과도 유사하다. 무엇이 진실이고 허구인가를 가릴 수 있다고 주장해 왔던 전통적인 역사는 허구일 수밖에 없다. 모든 역사는 언어적인 구성물로써 역사의 대상이란 것 자체가 존재하지도 않으며 객관적 인식도 존재할 수 없다. 더욱이 역사는 지배와 권력의 메커니즘으로서 거대 서사라 할 수 있다. 이제 역사교육에서 도달해야 할 객관적인 인식도 사라지고 만다. 무엇이 객관적인 인식인가를 찾기 위한 노력도 허무할 뿐이다. 역사를 과거의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텍스트로 보아야 한다는 논리에서 수업이 이루어진다. 예컨대 역사 자체를 문제화하는 수업이 그것이다. 이론과 지식이 생성되는 사회적, 언어적 관례와 메커니즘, 그리고 이것이 작용하는 권력 관계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역사화’의 방법이다. 이는 곧 해체의 관점에서 인식론적인 수업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고, 실제로 그것은 역사의 이데올로기성 등 인식적인 특성을 드러내는데 크게 유용하였다. 그렇지만 역사교육은 인식의 객관성 측면에서도 논의될 필요가 있다. 포스트모던적인 가치를 일정 부분 인정해야겠지만 역사학은 여전히 객관적인 인식을 다루고자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역사가들은 역사적 본질을 찾고자 한다. 해체를 넘어 객관정신을 가지고 참다운 것이 무엇인가를 집요하게 밝히고자 한다. 그것은 역사가와 과거 사이의 대화에서 나오는 것인 동시에 개연성의 기준을 공유하는 탐구 공동체의 산물이다. 절대적인 객관성은 ‘고귀한 꿈(noble dream)’ 일가능성이 많다고 하더라도, 그 꿈의 이상에 근접하고자 하는 노력마저 부정될 순 없다. 실제로 많은 역사적 사건들은 역사가들의 연구와 논의의 진전을 통해 보다 명확하게 규명되어져 간다. 적어도 그들의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면 객관성의 가능성도 인정될 수 있고, 따라서 역사교육도 이러한 가능성 속에서 인식적인 학습의 가능성을 논의해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본고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회의론을 논의하면서 역사인식의 객관화를 위한 학습 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역사인식에서의 객관성 개념과 함께 이를 회의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장들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객관적인 역사인식의 가능성을 객관화(objectification)의 논리에서 검토하게 될 것이다. 끝으로 역사교육에서 객관적인 인식의 문제가 왜 중요한지를 살펴보고 역사인식의 객관화를 위한 학습의 방안도 모색하게 될 것이다.
다문화주의 관점에서 7차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 내용분석
趙 倞 敏
1. 머리말
2. 세계사교육과 다문화교육
3. 다문화주의 관점의 세계사 교과서 분석틀
4. 분석 결과
5. 논의 및 결론
국제결혼과 외국인 근로자, 새터민 등으로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 급속하게 다양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다문화교육의 필요성은 점점 커지고 있다. 다문화가정 출신의 아동들은 학교에서 말씨, 피부색, 문화 등의 차이로 따돌림, 학습결손, 부적응 행동을 보이면서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타민족, 타문화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교과서 서술로 대변되듯 학교교육이 단일 민족 문화를 지나치게 강요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다문화교육이 학교교육과정에 반영된 직접적 계기는 교육인적자원부가 2006년도에 ‘다문화가정 자녀 교육지원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비롯되었다. ‘2007 개정 교육과정’에는 범교과 주제의 하나로 ‘다문화교육’을 도입하였고 2006년 4월 28일, 발표된 ‘다문화가정 품어 안는 교육지원 대책’이라는 보도 자료는 현행 교과서에 담긴 순혈주의와 관련된 구절을 소개하면서 순혈주의와 편견으로 인하여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에 ‘다문화와 인권을 강조하는 교과서’를 개정해 나갈 계획임을 제시하였다. 2007년 3월에 발행한 5, 6학년 도덕교과서에는 혼혈아와 입양아의 문제가 예제로 등장하였다. 다문화교육의 문제점으로 ‘국제이해교육’과 ‘다문화교육’의 개념 혼동을 들고 있는데 ‘2007 개정 교육과정’도 ‘국제이해교육’과 ‘다문화교육’의 개념을 구분하지 않고 범교과 주제로 모두 포함시키고 있다. 다문화주의는 성별, 종교, 직업, 계층, 인종 등에서 비롯되는 각 사회집단들의 고유한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주류 또는 비주류 집단들의 문화를 동등하게 여기고 존중하는 것으로 평등성과 관련이 깊으며, 이러한 다문화주의를 청소년과 그의 가족들에게 교육시키는 것을 다문화교육이라 한다. 지구촌 다문화교육은 다문화교육의 이념을 국가의 영역에 한정짓지 않고 지구촌 전역으로 연결·확대시킨 개념이면서 국가별 문화적 차이와 아울러 각 나라에 공통되게 존재할 수 있는 개별 문화집단들의 다양성에 더욱 초점을 둔 개념으로, 뱅크스(Banks), 모리스(Moris), 린치(Lynch), 베이커(Baker), 데이비드먼(Davidman) 등의 학자들은 지구촌 다문화교육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린치는 지구촌 다문화교육이 세계의 다양한 문화를 인식하는데 있어서 국제교육과 다문화교육 이 두가지 접근방법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양한 문화 속에서 인식되는 문화적 우월감과 열등감, 이와 관련된 문화적 편견은 국제교육이 추구하는 정의와 인권 등 보편적 가치의 형성에 부정적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문제는 세계의 다양한 문화를 이해하고 수용하여 문화를 초월한 세계적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자질을 함양하려는 다문화교육을 통해 해결이 가능하므로 국제이해교육과 다문화교육은 상호보완의 관계이며, 이것이 지구촌 다문화교육이다. 우리나라의 다문화교육의 문제점은 주로 소수 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동화주의적 교육내용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소수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동화주의적 다문화교육은 주로 이주민 지원단체의 현장에서 실시되고 있다. 이주민 지원단체의 현장에서 실시되고 있는 다문화교육은 연속기획보다는 일회적 교육으로 끝나며, 다른 나라의 역사와 민속, 종교, 예술 등에 대한 문화적 이해보다는 음식체험, 문화체험, 놀이체험이 대부분이고, 교육주체가 교육·문화계와 같은 전문기관이 아닌 이주민 지원단체로 다수자 변화에 대한 관심도 부족하다. 또한 다문화교육 내용에 대한 연구가 부진하여 국제이해교육 프로그램을 모방하거나 각종 일회성 행사들로 짜여져 있으며, 교육과정의 변화를 도모하거나 다문화가정 자녀가 있는 학교나 교실에서 교과를 가르칠 때 변화되어야 할 교육내용에 대한 것들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이주자를 한국 사회에 적응시키려는 교육적 열의는 높지만, 한국인들이 이주자에게 적응해야 한다거나 이주자 공동체 내의 갈등을 해소하는 교육의 필요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즉 다문화교육의 목적, 교육내용, 교육방법에 대한 많은 실제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교육계가 중심이 되어 장기적 계획 하에 다수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다른 나라의 역사와 민속, 종교, 예술 등에 대한 교육과정을 통한 다문화교육의 실시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회구성원을 대상으로 하는 다수자 대상의 소수자 이해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며, 교육내용은 행사활동이나 문화체험, 기초학습 능력 습득에서 벗어나 다문화와 관련된 내용이 많은 국어, 사회, 역사, 도덕 교과를 통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현대세계는 모든 국가나 사회가 서로 긴밀하게 하나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지만 상대 문화에 대한 무지와 불신, 자민족·자문화 중심주의로 인한 국가 간·민족 간·종족 간·종교 간의 갈등과 분쟁은 정치, 경제, 군사, 종교적 문제와 결부되어 그치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다문화주의 관점의 세계사교육은 서구 외의 다른 문명들과 인종집단들을 충분히 대변할 수 있고, 역사적으로 세계의 여러 문화들이 서로 접촉, 교환, 상호의존하며 끊임없이 존재하여 왔고 오늘날 세계문화 형성에 기여하였다는 점을 강조하여 문화적 우월주의를 배격하여 현대세계의 문제해결에 기여할 수 있다. 그리하여 교육계가 중심이 된 학교의 정규 교육과정에서 다수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다문화교육 관련 과목으로 세계사는 적합한 교과라고 할 수 있다. 여러 교과들 중에서 세계 여러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어 다문화관련 내용이 가장 많은 교과이기 때문이다. 다문화주의 관점이 현행 7차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 잘 반영되어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는 세계사 교과서의 분석틀이 필요하다. 그러나 분석틀에 대한 연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7차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를 다문화적 관점에서 내용분석한 연구도 없다. 이에 대한 답을 내리기 위해서 선행연구를 통하여 다문화교육의 내용요소를 추출하였다. 이러한 다문화교육의 내용요소를 준거로 세계사 교과서의 분석틀을 제시하고 그 틀로 세계사 교과서의 내용을 분석하였다.
제7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의 오리엔트 문명 서술 분석
- 오리엔트 문명 일반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내용을 중심으로 -
李 東 奎
1. 들어가는 말
2. 단원별 내용 구성 및 위치 분석
3. 본문 서술 내용 분석
4. 학습 관련 자료 분석
5. 2007 개정 교육과정에서의 오리엔트 문명
6. 나가는 말
이 글은 현행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의 오리엔트의 문명에 대한 서술을 분석하고 검토하는 연구이다. 오리엔트 문명은 그리스 문명과 헬레니즘 문명, 로마 문명으로 이어지는 서양 고대사 흐름의 출발점에 위치하며, 인류 역사에 있어 처음으로 도시의 형성과 문자 기록이 시작된 인류 문명의 출발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오리엔트 문명에 대한 교과서의 기술은 보다 정확성을 추구해야 하며 문명의 시초에 대한 새로운 연구 성과의 반영이 절실히 필요하다 할 것이다. 본 논문의 고찰을 통해 나타난 것은 현행 교과서의 오리엔트 관련 서술에는 수많은 오류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가장 기초적인 용어의 사용이나 시대의 비정, 나아가 개인의 이름에 대한 오류까지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예를 들면 한 교과서는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을 남부 이라크의 수메르 지역에서 나왔다고 소개하며, 다른 교과서는 페르시아 왕가의 이름을 잘못 서술하고 있다. 또한 전체적으로 오리엔트 문명에 대한 최근의 연구가 반영되지 못하였고, 그 분량 역시 몇 페이지가 되지 않아 너무 왜소하다 할 것이다. 역사교과서에 있어 역사적 사실이나 용어 및 연대 등의 부정확한 표현과 서술, 잘못된 학습 자료의 수록 등의 문제는 비단 오리엔트 문명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현행 교과서에 대한 각 시기와 분야의 전문가들의 오류 지적은 결코 가벼운 문제라고 할 수 없으며, 교과서 집필이 보다 전문화 될 필요가 있다는 반증이라 할 것이다. 만약 이것이 여의치 않다면 최소한 각 시기와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하여 보다 정확하고 상세한 집필 기준을 제시한다든지, 보다 엄밀한 사후 감수를 통해 보완하여야 할 것이다. 세계사에 있어 오리엔트 문명에 대한 적절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우리는 세계사 교과서 전체의 단원 구성에 있어 아시아와 유럽의 이분법적 대립 구도가 서양과 비서양 사이의 역동성과 수동성, 진보와 정체, 침략과 저항이라는 이분법적 인식을 정당화하며 유럽을 문화 창조의 역동적 주체로 파악하도록 만든다는 주장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서양 역사의 시작에 있어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포함한 오리엔트 문명이 차지하는 영향에 대한 정확한 평가와 서술은 이런 이분법적 대립의 종식에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사 교과서 속의 미국
-제7차 교육과정 세계사 교과서를 중심으로 -
丁 慶 姬
1. 머리말
2. 근대 미국에 대한 기술
3. 세계 대전 시기의 미국에 대한 기술
4. 전후의 미국에 대한 기술
5. 맺음말: 보다 나은 세계사 교과서를 위한 提言
근래 우리나라의 세계사 교육은 학계와 교육계로부터 유럽 중심주의에 입각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최근에 출간된 『우리 눈으로 보는 세계사』는 현재 우리나라의 세계사 교육을 근원적으로 비판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려 애쓴다. 이 책은 부제--‘유럽 중심의 세계사를 우리 관점에서 비판한다’--처럼 세계사 교과서가 여전히 유럽 중심의 기술을 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보다 앞서 전국역사교사모임도 현행 세계사 교과서가 ‘유럽 중심주의’라는 문제점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그들이 대안교과서인『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를 쓰게 된 주된 동기는 ‘주연 유럽, 조연 중국’이라는 현행 교과서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현행 세계사 교육에 대해 비판적인 이들의 바람은 종래의 유럽 및 중국 중심의 세계사를 지양하고, 그동안 소외되어 온 동남아시아, 서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역사를 보강함으로써 새로이 균형 잡힌 세계사를 쓰는 것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균형 잡힌 세계사를 지향하는 우리나라 세계사 텍스트에서 예나 지금이나 제대로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미국과 일본의 역사다. 미국과 일본의 역사가 세계사 교과서에서 푸대접을 받고 있다는 것은 이 분야 전공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미국사와 일본사는 세계사 교과서뿐 아니라 국사 교과서 등에서도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먼저 국사 교과서에서의 일본에 대한 서술을 보면, 그 비중이 극히 작다. 중고등학교의 현행 국사 교과서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교과서의 현대사 편에서 일본에 대한 서술은 매우 인색해서, 일본에 대해 기술한 내용은 고등학교 국사가 네 문장, 중학교 국사가 두 문장뿐이다.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20세기 전반의 세계’ 및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세계’ 부분을 보면 중국사는 중시되는 반면, 일본사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일본에 대한 서술의 경우, 서술 비중도 문제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서술 내용이다. 현재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세계 인식에 입각해서 쓰였기에 전근대사 부분에서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았던 국명인 ‘중국’은 자주 등장하지만 7세기 후반에 왜국이 개명한 ‘일본’이란 국명은 찾기가 쉽지 않다. ‘왜’, 혹은 ‘왜구’라는 용어가 더 자주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국사 교과서에는 일본에 대한 적대감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즉 일본은 우리에게 여전히 잠재적 적국이라는 역사 인식이 고스란히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 역사 교과서는 이웃나라인 일본에 대해 단지 ‘침략자로서의 일본’이라는 과거의 이미지만을 제공할 뿐이며, 패전 후의 일본에 대한 이미지는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국사 교과서에서의 미국에 대한 서술도 마찬가지다. 현행 국사 교과서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한국현대사에 그토록 중요한 영향을 미친 미국에 대해서도 국사 교과서의 실제 서술 분량은 극히 미미하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의 경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의 역사 서술에서는 미국이라는 단어 자체가 거의 나오지 않고 있으며, 중학교 국사 교과서에서도 미국에 대한 서술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처럼 미국에 대한 서술 비중이 지극히 적은 것은 광복 이후 반세기 동안 미국이 한국에 대해 미친 커다란 영향에 비한다면 놀랍게 느껴질 정도라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국사 교과서는 아직 미국을 충분히 객관화하여 인식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세계사 교과서에서 미국은 과연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가? 본 논문에서는 역사를 균형 있게 바라보는 세계사 교과서를 지향한다는 커다란 전제 아래, 현행 고등학교 세계사 검정 교과서 3종의 미국에 대한 서술을 집중적으로 분석하려 한다. 제7차 교육과정의 세계사 교과서는 미국에 대해 어떠한 역사인식을 보여주고 있는가? 다시 말해서 세계사 교과서 속에 드러난 미국의 이미지는 무엇인가? 또한 세계사 교과서는 미국의 역사를 국제적인 맥락 속에서 파악하고 있는가? 이것이 본 논문에서 답해보려는 의문들이다. 단, 분명히 할 것은 본 논문의 분석이 교육현장에서 세계사 교과서를 다룰 때 생기는 문제점을 역사교육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사라는 역사학의 입장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현행 세계사 교과서를 이전의 세계사 교과서와 비교하여 미국에 대한 서술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검토하는 작업은 본 논문에서는 시도하지 않았다. 여기서는 현행 고등학교 세계사 검정 교과서 3종의 미국에 대한 기술, 즉 내러티브에 초점을 두어 분석하되,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는 기술이 발견된 경우에 가능한 한 수정의 방향을 제시하거나 기존의 기술을 대체할 새로운 기술 내용을 제시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는 본 논문의 목적이 현행 세계사 교과서의 미국에 대한 서술 내용을 비판적으로 검토·분석함으로써 모두가 지향하는 좀 더 바람직한 세계사 교과서, 즉 균형 잡힌 세계사 교과서의 서술 방향을 모색하기 위한 하나의 提言이 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국가 수준의 대학 입시 국사 문항에서 오답시비 유형 분석
金 秀 美
1. 머리말
2. 국사 문항의 경향과 오답시비 사례
3. 국사 문항 오답시비의 유형
4. 국사 문항 오답시비의 유형 변천에 따른 시사점
5. 맺음말
국가 수준의 대학 입시가 본격화된 예비고사에서부터, 학력고사, 그리고 현재의 수능으로 변천함에 따라 국사 문항에서도 오답시비가 가능한 문항을 유형화 시킬 수 있고, 그 유형이 변화하였다는 것에 착안하였다. 국사 문항에서 오답시비 가능성의 유형은 문항의 구성 요소인 문두, 제시문, 답지를 문항 단위로 풀이하면서 오답시비가 가능한 문항을 발견하고 이를 귀납적으로 범주화하였는데, 문두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 역사적 평가에 대한 질문인 경우, 답지 표현이 분명하지 않은 경우, 제시문을 가지고 정답을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 연구 성과의 축적에 따라 정답이 달라지는 경우, 고등학교 교육과정과 학술적 근거가 불일치하는 경우로 분류하였다. 오답시비의 6가지 유형과 변천에 따른 시사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문두가 분명하지 않아 오답시비가 가능한 문항은 예비고사와 학력고사에서만 볼 수 있었다. 즉 문두가 분명하지 못하여 출제의도가 수험자에게 정확히 전달되지 못한 유형으로 문항 제작의 수준이 낮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수능으로 오면서 문두의 불분명함으로 인한 시비는 볼 수 없었다. 문두가 모호하면 오답시비가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문두는 정교하게 구조화하고 분명하게 제시함으로써 오답시비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둘째, 역사적 평가에 대한 질문인데 문두에서 역사적 사건이나 사실에 대한 영향이나 결과에 대해 다양한 해석으로 발생할 수 있는 오답시비 유형으로 예비고사와 학력고사에서만 볼 수 있었다. 평가자의 관점에 따라 충분히 견해의 차이를 보일 수 있는 문항이 교과서 서술 내용을 기반했다고 하여 준거가 되는 것은 문항의 질적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수능에서는 역사적 평가에 대한 문항이 결론 도출 및 평가 문항으로 출제되는데, 자료를 종합하고 일반화하여 결론을 도출하는 문항이 출제의 어려움은 있으나 참신한 문항으로 개발되어야 한다. 셋째, 답지 표현이 분명하지 않은 경우도 오답시비가 가능하다. 답지가 문장 진술이나 개념어라 하더라도 답지가 불분명한 경우가 있다. 수능에서는 제시문을 분석하는 문항의 경우 정답을 고를 수 있거나 오답을 제거할 수 있는 단서를 준다든지, 국사 선지식을 모르더라도 제시문의 문맥만 제대로 파악하여 언어적 연상이 주는 추측요인으로 정답을 고를 수 있다는 점 등이 단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넷째, 제시문만 가지고 정답을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이다. 사고력을 측정하는 수능 국사 문항에서는 제시문(지문)이 필수 구성 요소이지만 제시문으로는 정답을 찾기 어려운 문항이 있다. 이러한 유형은 제한된 문두와 제시문만 가지고는 단서가 부족하여 정답을 찾을 수 없거나 제시문의 내용이 정답을 한정하지 못하는 경우, 교과서의 사실과 제시문의 특수적 자료의 사료 해석이 다른 경우 오답시비가 있을 수 있다. 제시문 선정은 문항의 질을 좌우하는 중요한 여건이므로 문두와 제시문이 긴밀성을 갖는 제시문 개발이 필요하다. 다섯째, 연구 성과의 축적에 따라 정답이 달라지는 경우인데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가 1980년대에 주로 축적되고 교과서의 반영은 1990년대에 되다보니 학력고사 문항에서 발견된다. 이는 연구 성과에 비추어 정답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데 역사적 사실이 재해석되는 국사 과목의 성격이 드러나는 문항 유형이라 할 수 있다. 여섯째, 고등학교 교육과정과 학술적 근거가 불일치하는 경우인데 국가 수준의 대학 입시 문항에서 계속 제기 되고 있는 유형이다. 교과서 내용과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범위 안에서는 정답이지만 학술적으로 깊이 있게 들어가면 정답이 없다는 시비도 발생하게 될 수 있는 문항 유형으로 교과서에 있는 내용의 오류 또한 지적하고 학술적 근거까지도 명확하게 검증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辰國의 變轉과 ‘辰王’의 史的 推移
徐 毅 植
1. 序 言
2. 後漢書 辰國·辰王 記事의 點檢과 理解
3. 辰王 共立 政治體制의 變轉과 辰國
4. 渠帥層의 王者的 性格과 ‘辰王’의 史的 推移
5. 結 語
三國의 국가 형성 과정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것이 三韓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그러나 삼한에 대해 우리 측에서 남긴 기록이 전무하다시피 한 형편이어서, 第三者로서의 관점과 흥미에서 傳聞 내지 轉聞을 기록한 것인 데다 誤·脫字가 적지 않아 더러는 文意마저 알기 어려운 中國 문헌에 의지하여 삼한 문제에 접근하다보니 몇몇 사실의 이해에서는 서로 견해가 갈리고 관점이 어긋나 피차 납득하기 곤란한 三韓 社會相을 제시하는 경우도 생긴다. 辰國 및 辰王을 둘러싼 이해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진국·진왕에 대한 이해의 分岐는, 三韓 諸國이 모두 옛 진국에서 나왔으며 진왕은 삼한 전체의 왕이었다는 『後漢書』의 기록을 신뢰하여 사실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의 여부에서 시작되었다. 이 『후한서』의 기사가 『三國志』와 상치하는 것처럼 보이는 데 문제가 있었던 것인데, 『삼국지』에는 辰韓이 옛 진국이라고만 서술되어 있을 뿐 삼한이 모두 진국에서 나왔다거나 진왕이 삼한 땅 전체의 왕이라는 내용이 없다. 따라서 후대의 撰述인 『후한서』가 『삼국지』의 기사를 恣意的으로 變改한 것이라고 판단하는지 아니면 나름대로 그렇게 쓴 典據가 따로 있었으리라고 생각하는지에 따라 견해가 갈리게 되었다. 게다가 『삼국지』 자체 내에서도 月支國을 다스린다는 辰王과 弁·辰韓 24국 중 12국이 속해 있다는 辰王이 竝述되어 있어, 兩者가 같은 존재를 지칭한 용법인지 아닌지를 둘러싸고서도 다시 의견이 나뉘었다. 삼한으로 分立하기 전에 그 땅 전체를 다스린 辰王의 辰國이 실재했다는 견해부터 진국이고 진왕이고 모두 추정과 상상의 결과로 만들어진 문헌상의 존재일 뿐 실체가 아니라는 견해까지 異論의 스펙트럼이 대단히 폭넓게 분포한다. 하지만 그동안 연구가 진행되면서 대체로 『삼국지』의 사료 가치를 더 높이 인정하는 쪽으로 논의가 정리되어 왔다. 진국과 진왕이 존재했다는 것은 사실로 인정하면서도 삼한이 진국에서 나왔다든가 ‘盡王三韓之地’한 辰王이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뚜렷해진 것이다. 『후한서』의 기사는 단지 후대에 성립한 인식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실제의 역사 사실과 구분해서 파악해야 한다는 생각이 논의의 기저를 이뤘다. 그러나 이는 관련 자료를 새로 발견했다거나 딱히 이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논리적 근거를 확보한 결과는 아니었다.『삼국지』가 『후한서』보다 약 150년 앞서 편찬된 사서라는 점을 중시하고 삼한의 70여 개 소국에 앞서 그 전체를 統轄한 대국이 먼저 존재했을 개연성은 희박하다고 판단한 결과일 뿐이었다. 記事를 字句대로만 읽고, 삼국의 국가 형성 과정을 이해하는 데 서구 인류학의 社會發展段階論을 仍襲的으로 적용해 온 끝에 도달한 필연적 귀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논의의 방향이 이렇게 쏠리고 보니 크게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생겼다. 하나는 삼국 이전의 사회 상태를 古代에 이르지 못한 원시공동체 단계로 파악하게 됨으로써 古朝鮮에서 三國으로의 進展에서 繼起性을 부인하게 된 것이고, 또 하나는 이런 認識의 歸結로서 黃河文明과 뚜렷이 구분되는 大凌河·遼河 流域의 獨自的 高度文明(이른바 ‘遼河文明’ 혹은 ‘渤海文明’)에 대한 이해 능력을 상실하여 제 역사를 세계사적 전망 위에서 파악할 기반을 沒却하게 된 것이다. 신라가 원시 촌락 몇이 결합하여 세운 사로국의 발전 형태로 규정되고, 나아가 고조선 아닌 사로국이 한국사의 기원으로 파악되며, 삼국 중 고구려는 물론 그 성립 배경으로서의 고조선 또한 한국사의 전개와는 ‘객관적으로’ 무관한 존재로 이해되기에 이른 현실이 문제의 현주소를 말해 준다. 筆者는 그동안 고조선 사회의 계기적 발전이라는 맥락에서 삼국의 성립 과정을 파악하지 않으면 한국고대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누차 지적해 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삼국지』와 마찬가지의 비중을 두고 『후한서』의 기사를 적극 활용하는 연구 자세를 견지하였다. 두 기록을 동시에 충족하는 방향에 역사의 진실이 놓여 있으리라 생각한 때문이었다. 兩者擇一的인 史料 運用은 恣意的 判斷을 부추기기 쉽다. 이러한 見地에서 本考에서는『후한서』의 사료적 가치를 정면에서 살피고, 그 토대 위에서 辰國·辰王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확대해 보고자 한다. 어느 견해든 그것이 확실한 근거 위에서 구축된 이해체계라면 응당 받아들여야 마땅하겠지만, 砂上樓閣이라면 가급적 조속히 철거하여 역사의 본모습을 복원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릇되었음을 알고서 그것을 바꾸는 데 주저하거나 지체해서는 안 된다.
朝鮮前期 祿俸의 頒給과 官僚家計
申 幼 兒
1. 序 言
2. 祿俸의 授受와 君臣의 義理
3. 祿俸의 財源磨鍊과 制度修整
4. 祿科額과 官僚家計
5. 結 語
祿俸은 왕조국가에서 관료에 대해 그 職事에 종사한 대가를 지불하는 물적 보상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관료에 대한 대우는 수조권을 누릴 수 있는 토지를 지급하는 방식과 정기적으로 현물을 지급하는 녹봉의 방식, 두 계통에서 이루어져 왔다. 양자는 관료의 직무수행과 관련한 보상이라는 점에서 기본 성격이 유사하였으나, 그 의미와 제도의 운영 방식은 달랐다. 양반관료에게 토지의 분급은 職에 대한 대가인 동시에 世臣으로 대우하는 世祿이었기 때문에 퇴직 후나 사망 후에도 守信田·恤養田의 형태로 傳授가 허용되었다. 따라서 현직에 있는 관료에게는 실제로 職事를 수행하는 것에 대한 보상을 별도로 해주기 위해 품급에 따라 米·布 등 현물이나 저화와 같은 화폐를 줌으로써 그 수입이 토질이나 작황에 따라 좌우되는 것을 막아 관료의 생활을 안정시켜야 했다. 科田 외에 따로 녹봉을 절급한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양반 관료에게 토지와 녹봉을 모두 지급하는 제도는 조선 명종 11년(1556)에 토지에 대한 수조권 분급이 폐지됨으로써 중단되었고, 이후 관료에 대한 대우는 녹봉으로 일원화되었다. 그러므로 녹봉이 관료의 생활에서 수행하는 역할은 실로 적지 않았고 국가 재정에서 점하는 비중 역시 상당하였다. 녹봉이 국가와 관료에게 갖는 비중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토지 분급에 관한 연구는 많이 있었던 데 반해, 녹봉에 관한 연구는 부진하였다. 녹봉에 관한 연구는 그 시기가 주로 고려시대에 집중되어 있었고, 내용은 職窠別 녹봉규정에 대한 해명에 그쳤다. 조선전기 녹봉제도에 관한 연구도 중점을 그 지급 대상의 분류와 녹봉의 지급 절차,『경국대전』에 기재된 受祿 대상별 科額 제시에 두었고, 연구 방향은 녹봉제도의 정비과정을 체아직의 설치와 더불어 관료제가 문란해져 가는 과정으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녹봉제의 윤곽은 대강 밝혀졌으나 새로 이해하고 구명해야할 국면들이 상당히 남아있다. 녹봉이 지녔던 다양한 가치 및 녹봉의 財源, 녹과액이 관료 家計에서 수행하였던 역할 등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본고는 이에 주목하여 녹봉을 통하여 매개되었던 군신간의 관계, 국가가 관료의 녹봉으로 인해 부담하였던 비용 및 그것이 국가재정 속에서 점하는 비중, 국가의 처지와 형편에 따라 변화된 녹봉제의 정비내용, 녹과액이 시중 물가에 비추어서 가졌던 가치와 규모, 녹봉을 통하여 얻어진 관료의 소득과 그 생활상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이렇게 하면 조선전기 녹봉제의 실체에 한 걸음 더 접근해 볼 수 있고, 조선왕조가 국가를 經理해 나간 원리와 관료제 국가로의 진전을 한층 실제에 가깝게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朝鮮後期의 鄕村防衛實情과 民堡論
河 明 埈
1. 序 言
2. 鄕村防衛實情과 그 課題
3. 民堡防衛論의 定立과 影響
4. 結 語
조선후기는 양란 후의 대내외적 혼란을 수습하는 것을 과제로 하고 있었다. 이른바 國家再造의 問題였다. 이에 정부는 사회·경제적 발전을 촉진시켜 국가적 역량을 제고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였다. 군사 전반에 대한 조정도 뒤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중앙군의 戰力을 더욱 증강시키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17세기 후반 五軍營體制의 확립은 그러한 노력의 소산이었다. 하지만 중앙위주의 군사정책은 상대적으로 지방군의 허소화를 초래하는 배경이 되었다. 지방군은 국방의 일선에 위치하여 外敵을 방어함과 동시에 內亂을 진압하고 향촌민을 통제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으므로, 지방군의 기능 저하는 향촌방위를 위태롭게 만드는 중대 사안이 아닐 수 없었다. 이는 국가의 존립과 보전에도 직결되는 사항이었다. 그런데 조선후기 지방군의 허소화는 단순히 군사부면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즉 신분제와 부세제도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태 해결의 복잡성은 여기에 있었다. 당시의 官人·儒者들은 지방군의 허약을 국가의 총체적인 위기로 간주하면서 이를 수습·타개하기 위한 방안이 절실하다는 점에서는 대체로 인식을 같이하였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고 실천하는 측면에 있어서는 논자의 당색이나 신분적 처지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또한, 지방군의 역할과 상관되는 民亂의 진행 정도나 대외관계의 안정 여부에 의해서도 그 대책의 범위와 강도는 달라질 수 있었다. 따라서 지방군의 약화 문제를 처리·극복하기 위해 제시된 政論家들의 鄕村防衛策을 검토하면 전통 국방사상에 대한 계통적·단계적 이해의 폭과 깊이를 더하고 아울러 그것을 배태한 朝鮮後期의 歷史像을 계기적·종합적으로 파악하게 하는 단서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와 같은 鄕村防衛策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茶山 丁若鏞이 제시한 民堡論이다. 다산은 19세기 초반 통신사 교섭이 난항을 겪는 것을 일본 침략의 前兆로 간파하고 그 대비책으로 자신의 鄕村自衛論이 집약된『民堡議』를 저술하였다. 이 저작은 在來의 향촌방위책을 정리·소화하고 당대의 군사역량 및 향촌사회의 동향을 고려하는 가운데 案出된 것이었다. 이후 다산의 민보론은 19세기 중반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이 본격화되는 시기에 공식적인 국가 비변책으로 채택되었으며, 韓末에 이르기까지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런 까닭에 다산의 민보론을 중심으로 그 전후의 향촌방위책을 살펴보게 되면 앞서 언급한 所期의 성과를 어느 정도 거둘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간 다산의 민보론에 관한 연구는『민보의』의 작성 배경, 내용, 의미, 영향, 성격에 대해 전반적인 사항을 설명하고, 거기에 더하여 귀중한 견해와 시사를 제공해 주었다. 이제는『민보의』가 제출되고 국가적으로 그 적용이 강구될 수 있었던 제반 요인을 조선후기의 군사정책과 향촌방위책, 사회적 동향, 거시적인 역사 전개 양상과 결부시켜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그 속에서『민보의』의 시대적 의미를 摘出하는 것이 과제이다. 이에 대해 本稿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성을 통해서 다산의 민보론을 보다 면밀하게 검토하고자 한다. 첫째, 중앙위주의 군사정책 등으로 인한 지방군의 허소화 실태를 진단하고,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하여 향촌자위책이 요청되는 사정 및 그 대책의 내용을 계통에 입각해서 밝힐 것이다. 둘째, 19세기적인 內憂와 外患의 상황에서 재래하는 향촌방위책을 집성하여 정립된 민보론의 목표 및 기반, 골격과 승계 사정을 구명하고자 한다.
한말 근대개혁의 추진과 ‘格物致知’ 인식의 변화
具 姬 眞
1. 서언
2. 東道西器정책과 ‘格致學’
3. 갑오개혁 이후 근대국가를 위한 사상과 학문의 모색
4. 광무개혁기 ‘유교(國敎)’·‘격치’의 분리와 변용
5. 결어
한말 근대개혁의 추진과 더불어 사상, 학문, 교육에도 변화가 진행되어갔다. 유교를 학문과 교육의 근간으로 하였던 우리나라 중세에서 인식과 수양은 ‘格物致知論’에 근거하였다. 이는 인륜과 도리를 중심으로 궁리하는 가치체계이고, 物理를 道理에 종속시켜 파악하여 우주·자연·인생을 도리를 중심으로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인식체계였다. 그리고 격치는 치국·평천하의 근간이었으므로 치자층의 입장에서 학문의 사회적 역할을 규정하였다. 이러한 사상체계는 조선후기 봉건사회의 해체와 더불어 변화하였고, 근대개혁의 추진과 함께 변용·해체되어 근대적인 사유구조로의 전환이 이루어져갔다. 본고는 국교확대이후 광무개혁기까지 근대개혁의 추진과 더불어 근대적 사유구조, 학문구조가 형성되어가는 과정을 동도서기·구본신참 개혁을 추진해가는 계열의 격물치지에 근거한 사유의 변화를 중심으로 살펴보려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이 우리사회에서 근대적 사유체계의 형성과정과 특징의 일단을 밝히는데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근대개혁기 전통적 사유의 변화과정에 대한 연구는 세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첫째는 개별 인물, 특정 지역 지식인들의 사유의 변화를 규명하는 것이다. 둘째는 ‘동도서기’, ‘변법론’ 등이 전통사상에 근간한 개혁론으로 연구되었다. 셋째로는 주로 국권회복운동기에 이루어진 구학과 신학의 논쟁을 중심으로 전통학문과 신학문의 갈등과 의의를 규명하는 것이었다. ‘개화사상’, ‘개화파’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반면 이 분야에 대한 연구는 소략하다. 지금까지의 연구로 전통적 사유의 변화에 영향을 주었던 서구의 사상, 근대적 사유의 전반적인 수립과정, 근대개혁론 등이 대략적으로 밝혀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구체적인 사유양식의 변화를 규명하며 내적 발전과정을 체계화하는 연구는 출발단계로 보인다. 유교사상에서 ‘격물치지’는 인식방법, 가치체계, 학문의 주체와 역할을 규정하는 것이었으며 근대사상의 형성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국교확대이후 동도서기정책이 추진되면서 ‘西器’로써 수용되었던 서양근대의 과학적 인식과 학문은 ‘格物致知’, ‘格致學’으로 소개되며 格致라는 용어와 인식을 대체해갔다. 이후 대한제국은 근대문명에 의해 뒷받침된 제국주의 침략의 위기에 대응해서 구본신참의 개혁을 추진하면서 동도서기를 ‘유교’와 ‘격치’로 분리하여 각각의 역할을 정했다. 또한 대한제국의 변통을 촉구하던 개신유자들은 ‘격물치지’를 조선후기 실학을 계승하여 근대개혁에 임하는 자세로 재해석하기도 했다. 이처럼 격치라는 용어와 격물치지에 근거한 사유를 변용하면서 근대적 사유를 형성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본고는 한말 근대개혁의 추진과 더불어 진행되고 있었던 근대적인 사유체계의 수립을 ‘격물치지’에 근거한 도리중심의 가치체계, 우주·자연·인생을 도리를 중심으로 통합적으로 파악하며 물리를 도리에 종속시켜 이해하는 인식방법, 학문과 지식의 주체와 역할에 대한 사유의 변화를 통해서 규명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다음과 같이 세분화해서 살펴보겠다. 첫째로, 1880년대 조선정부가 ‘東道西器’적인 개혁을 추진하면서 진행되었던 격물치지인식의 전환을 살펴보겠다. 조선정부는 주로 중국을 통해 서구의 기술과 학문을 수용했는데, 이는 ‘격치학’으로 소개되었다. 서구근대의 과학과 기술이 ‘격치학’으로 소개되었던 배경과 이해의 실태 그리고 영향을 살펴보겠다. 이처럼 격치학의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儒者가 갖추어야할 학문과 교육에 대한 인식에 변화가 생겼다. 격치학은 治者의 학문을 함의하였으므로 고등교육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변화를 살펴보겠다. 그리고 조선정부의 동도서기정책이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와는 다른 방향으로 근대개혁 방안을 구체화하는 지식인계열이 있었으므로 이들의 격치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겠다. 둘째로, 개화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갑오개혁이 학문과 교육에 끼친 영향과 이후 근대국가체제를 뒷받침하기 위한 학문과 사상이 모색되는 과정을 살펴보겠다. 갑오개혁은 부국강병과 국민양성을 위한 학문과 교육을 모색했다. 이것이 어떠한 내용과 특징을 지니는지와 이 속에서 격치가 어떻게 변용되는지 살펴보겠다. 그리고 갑오개혁 중단 직후 유학과 전통교육기관의 개혁시도가 문명개화론자들에 의해 저지되는 과정과 문명개화를 지향하는 지식인들의 신학문중심의 논의가 대한제국초기에 파정을 맞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면서 전통학문과 신학문의 갈등과 대한제국의 국체를 뒷받침하는 사유가 모색되는 과정을 검토해보겠다. 다음으로, 1899년 대한제국의 국가체제가 정비되는 시기를 전후해서 대한제국정부와 개신유자들이 표방한 구본신참의 개혁이념과 연계하여 ‘격물치지’의 역할을 살펴보겠다. 대한제국정부는 전제군주국체를 토대로 근대개혁을 추진하려 하면서 이를 뒷받침하는 이념으로 ‘宗敎’와 ‘格致’를 분리하였다. 한편에서는 당면한 왕권과 국권의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도리중심의 가치체계를 고양하는 유교의 국교화를 추진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신학제에서 격치를 가르쳐 부국강병하려했다. 개신유자들은 대한제국의 대변통을 촉구하며 이념을 뒷받침해갔는데 구본신참의 변법론의 일환으로 격물치지를 조선후기 실학의 개혁자세와 연계시켜 이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권위기가 심화되면서 유자층을 중심으로 하는 담론의 성격을 가지며, 물질문명의 수립을 중심으로 이해되고 있는 격치에 주목하기보다는 국민의 역할을 중시하여 국민이 도리중심의 가치체계를 가지고 국권을 수호하도록 하는 방안이 모색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격물치지인식의 변용과 역할에 대해 살펴보겠다.
대한제국기 언론의 ‘종교사회’ 인식
金 鍾 俊
1. 머리말
2. 1904년 이전 ‘종교’ 인식과 ‘敎案’
3. 1904년 이후 ‘종교사회’에 대한 기대와 우려
4. 맺음말
개항기 서구문물의 수용에 발맞추어 ‘종교’와 ‘사회’는 각각 그 개념과 영역을 정립해 갔다. 또한 ‘종교사회’라는 용어로 결합되면서 ‘종교에 기반한 단체’를 지칭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종교사회’는 추상적으로는 ‘문명’, ‘애국’ 개념과 연관되고, 실제적으로는 ‘지역사회’, ‘외세의존’의 문제와 관련된다는 점에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본 연구는 대한제국기 주요 신문 자료에 나타나는 ‘종교사회’에 대한 인식을 살펴볼 것인데, 특히 당대 언론과 지식인들이 ‘종교사회’의 개념을 정립해가는 과정에서 ‘종교사회’에 기대했던 것과 실제 ‘종교사회’의 존재 양상 사이에서 발생하는 괴리에 주목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와 ‘사회’에 관해 개념사·사상사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종교사회’에 관한 담론사·사회사적 접근법을 채택하고자 한다. 한국 근대사에서 ‘종교’와 ‘사회’가 결합되어 ‘종교사회’로 사용될 때 언론이 이를 어떤 방식으로 이해했는가에 관한 문제를 다룬 연구는 없지만, ‘종교’와 ‘사회’ 개념의 정립 과정에 대한 연구는 일정하게 이루어져 있다. 먼저 ‘종교’는 1883년『한성순보』에서 처음 사용된 이래 ‘문명화’, ‘민족 정체성’, ‘인민교화’ 등의 관점에서 다루어졌다고 한다. 이 시기 ‘종교’는 ‘정치’, ‘교육’, ‘의료’ 등의 영역에서 분화 및 순수화 과정을 거쳤고, 신분적으로 대중화되기도 했다. ‘사회’의 경우 1896년 일본유학생에 의해 처음 사용된 이래『독립신문』에도 등장하나 아직 개념어로서 정착된 것은 아니었다. 1905년 이후에야 ‘사회’ 개념이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하는데 ‘사회 상층부의 국가 권력 독점을 막고 개명한 인민의 권력이 확장되어 가는 장’으로서의 ‘사회’ 개념(『만세보』), ‘국가를 가능케 하는 성립 기반’으로서의 ‘사회’ 개념(『대한매일신보』), ‘체계화·일반화·탈정치화하면서 국가와 구별’되는 ‘사회’ 개념(『수신 교과서』) 등으로 구분된다. 그런데 이 시기 실제 ‘사회단체’에 대해서는 ‘애국단체’와 ‘친일매국단체’의 이분법적 구분이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근에는 ‘매국단체’의 ‘사회’ 표방이 갖는 의미와 당대 언론의 대응에 관한 관심도 생겨났다. 이처럼 1900년대 말이 되면 ‘종교’와 ‘사회’에 대한 개념 정립이 오늘날과 거의 유사한 수준에까지 이르게 된다. ‘개인은 사회를 구성하는 원소이고, 사회는 개인이 생활하는 기관’으로 ‘문명을 증진시키고자 하거나 국력을 발휘코자 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정의나 ‘사회는 개인의 공동단체이고, 국가의 각종 부분’이라는 정의가 등장한다. 이처럼 개인과 사회, 국가의 관계가 정의된 후 이들 관계를 부패시키지 않고 凝結시키며, 환산시키지 않고 서로 注合시키는 것이 ‘종교’이며, 이는 곧 ‘도덕심의 배양’을 의미하는데 기존 종교인 유교가 그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개인과 국가 사이에 사회를 위치시키고, 3자를 정신적으로 엮어주는 역할을 종교에 기대하고 있으며, 이를 다시 ‘문명’과 ‘국가’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사회’, ‘단체’의 한 부분으로써 ‘종교사회’에 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은 1904년 이후의 일이다. 1904년 이전 언론의 ‘종교사회’ 인식은 일상적인 담론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았고, 특별한 사안이 발생했을 때 이에 대한 대응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이 때 ‘특별한 사안’의 하나로 ‘敎案’을 들 수 있다. 따라서 먼저 1904년 이전 언론사별 ‘종교’ 인식은 어떠하였고, 특히 ‘교안’ 사건이 어떠한 논리 구조 하에서 파악되고 있었는지 살펴보았다. 1904년 이후 언론은 ‘문명’과 ‘애국’, ‘지역사회’와 ‘외세 의존’의 관점에서 ‘사회’ 일반에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표하고 있었다. ‘종교사회’도 그러한 ‘사회’ 중 하나로 다루어졌고, 언론사별로 논조에서 일정한 차이를 보였다. 이 시기 ‘종교사회’에 관한 인식에서 언론사별 주요 강조점은 무엇이었는지 언론사별 유사성과 차이점에 유의하여 검토해 보았다.
[彙 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