論 文
중학교 역사 교사의 사료 활용 양상에 나타난 특징과 문제점 분석
李 美 薇 … 1
역사 수업에서 사료 활용의 중요성은 국내외에서 일찍부터 강조되었다. 중·고등학교 역사 수업은 종종 역사 지식 암기에 치중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데, 사료 활용은 지식 암기를 넘어선 역사 탐구를 가져올 것이라는 점에서 특히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아직까지 교실 수업에서의 사료 활용 실천에 관한 연구, 특히 교사들이 어떤 사료를 수업에서 어떻게 활용하는지에 대한 연구는 찾아보기 어렵다. 본 연구에서는 14명의 중학교 역사 교사가 동일한 내용 요소(‘신라 사회의 동요와 후삼국의 성립’)를 수업하면서 어떤 사료를 어떻게 활용하였는지를 분석하여 중학교 역사 수업에서의 사료 활용 현황을 파악하고 나아가 사료 활용 수업이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였다. 14명의 역사 교사는 일상적인 역사 수업에서 사료를 널리 활용하고 있었다. 교사의 사료 활용은 교과서 사료와 교과서 사료 활동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사료의 신뢰도를 판단하도록 도움을 주는 출처나 제작 시기, 저자 정보를 논의하지 않았다는 특징을 보였다. 사료는 역사적 사실이 일어났음을 확인하는 목적으로 수업에서 활용되고 있었다. 이렇듯 14명 교사의 사료 활용에서는 서로 수렴되는 지점도 찾을 수 있었지만, 교사가 설정한 수업의 내용 초점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연구 결과에 기초하여 교사의 사료 활용을 다변화하고 심화하기 위한 교재 설계 방안을 모색하였다.
독일 대학입학자격시험 아비투어의 역사과 試驗 분석: ‘史料의 분석과 비교’ 문항을 中心으로
裵 志 惠 … 37
본 연구는 독일의 대입자격시험인 아비투어 시험을 최근 5년간 출제된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역사과 시험 문제와 제안 답안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역사과 아비투어 시험은 주의 역사과 교육과정과 ‘아비투어 시험 통합 관리지침’에서 제시한 ‘지식(사실)-, 방법(탐구)-, 반성-, 방향설정(판단)역량’에 대한 평가로써 구성되었다. 최근 5년간 출제된 BW주 역사과 아비투어 시험은 근현대의 정치사 그 중에서도 특히 민주주의의 발전을 주요 내용으로 다루고 있다. 시험은 매년 두 가지의 주제로 출제되며 학생은 시험장에서 한 주제를 선택하여 답안을 작성한다. 1회 분의 시험은 세 개의 자료와 네 개의 문항으로 구성된다. 최근 5년간 출제된 10회 분의 시험에서 제시된 자료는 연설문, 보고서 등의 텍스트 자료 15개와 캐리커처, 선거 포스터의 이미지 자료 15개로 구성되었다. 문항은 사료의 분석 10문항, 사료의 분석과 비교 10문항, 역사적 사건이나 정책에 대한 설명 10문항, 역사적 명제에 대한 평가하기 10문항이 출제되었다. 전체의 절반을 차지하는 ‘사료의 분석과 비교’ 문항의 제안 답안의 구성을 살펴보면 ‘사료에 대한 객관적 정보 기술, 사료 내용이나 구성요소에 대한 요약, 역사적 맥락에서의 사료 해석, 사료가 전하는 주장이나 의도 설명, 분석 내용의 요약’의 순서로 전개되었다. 사료 분석 및 비교 문항의 제안 답안은 한 개의 사료는 상세히 분석하고, 두 번째 사료는 비교의 내용으로 공통점과 차이점을 설명하면서 필요한 내용만 기술하도록 안내하였다. 두 사료의 비교에서는 창작 시점, 장소, 작가의 의도, 수신인 등을 기준으로 공통점과 차이점을 기술하도록 안내하고 있다. 이러한 사료의 분석과 비교의 답안 작성 과정은 사료의 내용에 대한 체계적 역사 해석을 요구하며, 이는 역사학에서 흔히 사용하는 인용의 방법을 활용한 네러티브 능력을 요구한다. 그 밖에 본고에서 살펴본 ‘설명하기’, ‘판단하기’의 문항 형태는 판단력, 논리력, 의사소통능력 등의 종합적 사고력의 평가 방안으로 한국의 초·중등학교 역사과 수업과 평가에서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는 다음의 두 가지를 주장한다. 첫째, 사료의 분석과 해석 역량에 대한 학습과 평가의 비중을 늘려야 한다. 학생 스스로의 사료 분석에 기초한 역사적 판단과 평가는 역사하기의 과정이자 역사 학습의 목적이다. 역사 학습은 주어진 역사 지식의 이해와 암기가 아닌 역사적 사고력 함양이 되어야 하고 역사 학습에 대한 평가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이를 위해서는 특히 교육과정의 성취기준 수준에서 사료 분석을 통한 학생의 역사적 판단을 요구하는 학습 목표가 제시되어야 한다. 둘째, 교육과정에 제시한 역사 역량에 대한 평가가 될 수 있도록 시험의 형식과 내용을 바꾸어야 한다. 현행 수능의 객관식 시험은 역사 자료 분석, 글쓰기의 의사소통, 역사적 판단력 등의 고차적 사고력을 평가하는 데에 부적합하다. 학교에서의 지필 평가에서 이루어지는 서·논술형 시험이 확대되어야 하겠다. 이의 실천을 위해서는 교사가 활용할 수 있는 평가 문항과 채점을 위한 제안 답안 및 기준 문서 등을 개발하여 제공하고, 교사의 평가 역량 향상을 위한 연수 등의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 역사과 평가는 신뢰도 보다는 타당도를 우선하는 시험이 되어야 하겠다.
일제 시기 충북 지역의 주민대회와 학교비 갈등
金 鍾 俊 … 73
본 연구는 교육사와 지역사의 관점을 결합시켜 일제 시기 충북 지역에서 학교비 갈등 때문에 일어난 주민대회의 양상을 살펴보았다. 1935년 시점에서 충북 지역에는 간이학교를 포함하여 100개교가 넘는 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어 있었다. 그래서 1면1교제가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입학난은 여전했고, 지역주민들의 기대는 충족되지 못하였다. 애초에 충북 지역민들은 사립학교를 공립학교로 전환시켜 가면서, 국가가 학교 설립을 지원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학교 설립을 문명과 계몽의 관점에서 바라본『매일신보』와는 다르게『동아일보 』와『조선일보』는 불필요한 세출과 과도한 지역민 부담을 줄여 학교비를 증액시켜 한다고 조선총독부에 강하게 요구하였다. 이는 의무교육 실시를 촉구하는 여론으로 확장되었다. 충북 지역사회 역시 이같은 중앙 언론의 목소리를 배경으로 학교비 지원을 요구하는 주민대회를 열기 시작하였다. 지역에 따라 저항의 세기가 달랐고, 지역 내부의 민들 간 분열과 갈등의 요소들도 존재했다. 1930년을 전후하여 충주와 영동 지역에서는 보다 강경하게 행정 당국에 불만을 제기하는 사례가 나타났다.『조선일보』는 이를 민족적, 계급적 갈등 구도로 형상화하기도 했다. 학교 설립 및 운영을 둘러싼 주민대회를 들여다 보면 횡적으로 지역사회 내부의 공공성 문제, 종적으로 통치권력의 정당성 문제가 제한적이나마 표출되고 있었다.
해방 후 상업 법령과 당대 상업 전문서(대학 개설서·교과서)로 본 객주·객주업
柳 承 烈 … 113
본고는 해방 직후부터 1970‧80년대까지를 대상으로 거의 불모지나 다름없다 할 객주에 대한 실증적 탐구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그동안 어쩌면 ‘망각된’ 존재였던 객주가 해방 직후 빠르게 복원해 유통 체계의 중심에서 나름의 자기 역할을 한 실상을 관련 법령과 대학교 및 초중등학교에서 사용된 상업용 개설서와 교과서를 대상으로 집중 검토하고자 한다.
근래 일제강점 직후까지 명맥을 유지한 객주에 대한 주목할 만한 연구가 나오기는 했지만, 그동안 객주에 대한 연구는 조선후기를 중심으로 한말까지 한정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사라진 존재가 되어버린 해방 이후의 객주‧객주업의 실상에 대하여 한국인들에 의한 기록을 발굴하고 검토하는 작업은 꼭 필요하고 매우 소중한 일이라 할 것이다.
본고는 신자료를 근거로 한국 근대 상업의 중심적·필수적 존재임에도 그동안 무시되고 배척되어 온 객주 및 객주업의 실상을 확인하고 제자리에 되돌려놓으려는 작업으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다. 본고에서 검토하고 확인한 주요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법령상, 특히 세무와 관련된 영업세법상으로 ‘물산객주업’이 명기되고 세금이 징수된 것을 구체적으로 확인하였다. 법령상 상법에는 위탁매매로 되었으나, 구체적 상황을 반영한 영업세법, 시행령, 시행규칙 등에는 1975년까지 객주가 명시된 것을 확인하였다. 법령상의 규정은 공적 인정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매우 크다. 한국 역사상 최초의 규정이며, 1906년의 시도가 끝내 좌절된 저간의 사정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하다. 이런 점에서 1906년, 1961년과 1975년의 세 시점은 객주 변화사에서 중요한 시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시기를 주목하고 천착하는 것이 한국유통·상업사의 단초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淸의 駐韓公館과 韓淸 近代外交
鄭 東 然 … 159
본 연구는 청이 불평등조약과 서양 국제법 서적을 통해 주외공관 제도를 수용하는 과정을 분석한 다음, 이것이 주한공관 설립과 한청 근대외교로 이어지는 모습을 고찰하였다. 이 과정에서 전통외교와 근대외교 각각에서 유래한 합리성과 제국성이 작용하는 양상에 유의하였다. 즉, 외교학의 용어와 개념은 물론 주외공관의 운영 원리에 착목하여 청의 주한공관을 체계적으로 밝힌 개척적인 시도라 할 수 있다.
청은 서구 열강이 강요한 불평등조약과 주청공관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청의 주한공관에는 합리성과 제국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883년 청은 첫 번째 주한공관으로서 주조선상무서를 설립하였다. 이를 통해 청은 전통외교와 근대외교를 선택적으로 구사하여 제국성을 더욱 강렬히 표출하였다. 청의 두 번째 주한공관은 한청수교 이후 건립된 주한공사관과 영사관이었다. 주한공사들은 서양 국제법과 한청통상조약에 근거하여 교섭 사무를 처리해 나갔으므로 주한공사관·영사관의 합리성은 한층 보강되었다. 그러나 제1·2차 한일협약 이후 청의 주한공사관이 철수하고 주한영사관이 그 공백을 채우게 되었고, 이는 대한제국을 매개로 일본이 표출하는 제국성에 대응하는 과제를 지니게 되었다.
본 연구에서 청말 주한공관을 한청관계의 맥락 위에 놓고 전통외교와 근대외교의 착종 과정에 주목한 것은 선행 연구의 보완과 연구 지평의 확대라는 측면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 중국외교사의 측면에서, 청의 주한공관은 중앙 정부와 개인 차원의 외교 행위를 상호 관련성 속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발판이 된다. 따라서 청의 근대외교가 지닌 후진성이나 反침략성을 강조해 온 선행 연구의 관점은 재고될 필요가 있다. 둘째, 한중관계사의 측면에서, 청의 조선 정책은 전통외교와 근대외교 양쪽 모두에서 유래한 합리성과 제국성이 길항하는 과정에서 그 양상을 달리하였음을 규명하였다. 따라서 청의 조선 정책을 전통적인 속방 체제의 강화 또는 근대적 제국주의 어느 한쪽으로 이해하는 것보다는 양측 모두가 착종한 양상에 주목하는 것이 적절하다.
批評論文
사진역사분석학의 제창: 독립운동사 서술에서 나타나는 미디어자료의 활용
朴 桓 … 199
書 評
이시하라 슌(김이인 역), 『군도의 역사사회학』, 글항아리, 2017 : 헤테로토피아와 근대의 맞섬 그리고 생성
李 成 宰 … 235
彙 報